산청이야기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슬픈 역사의 지리산[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지리산 넓은 품에 슬픈 역사가 전해온다.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6.25 한국전쟁 전부터 지리산 곳곳에서 시작됐다. 한 쪽은 빨치산으로 또 한 쪽은 토벌대로 총을 들고 산을 올랐던 그들의 이야기는 국민 모두가 겪었던 고통인 전쟁과 분단의 역사, 그 서막이었다.

필수정보
  • 제1코스(중산리방면)중산전시관(두류동) ←5.4㎞→ 경남자연학습원삼거리 ←0.7㎞→ 순두류아지트 ←1.8㎞→ 법계사아지트 ←1.3㎞→ 망바위 ←1㎞→ 칼바위아지트 ←2㎞→ 두류동 주차장
  • 제2코스(대원사방면)소막골 주차장 ←0.2㎞→ 소막골아지트 ←2㎞→ 대원사 ←3.8㎞→ 중땀암반굴아지트 ←1.2㎞→ 윗새재 ←4.5㎞→ 조개골아지트
  • 제3코스(내대리방면)거림매표소 ←0.4㎞→ 길상암 ←0.8㎞→ 이영회부대아지트
  • 제4코스(내원리 방면)내원매표소 ←1.5㎞→ 내원사 ←3.5㎞→ 구들장아지트(정순덕 생포지)
  • 꼭 봐야할 풍경빨치산 루트에 있는 빨치산 아지트
빨치산 루트에 있는 빨치산 아지트
  • 법계사 아지트법계사에서 천왕봉을 향하여 가파른 등산길을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산막이다. 길가에 커다란 바위가 처마 같이 뻗어서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옛날에는 산짐승 서식처 였을 것 같고, 왜적에 항거한 의병들의 은둔처였으며, 빨치산 지리산이현상 부대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 순두류 아지트거대한 바위들이 자연요새를 만들어 놓은 곳. 외부와 능선이 훤히 보이고 아지트 앞에 식수원도 있음. 여러 개의 굴로 돼있고 출구와 입구가 달라 도망치기 쉽다.
  • 칼바위 아지트칼바위 맞은편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곳곳에 있는 소규모 굴. 본거지인 법계사 아지트와 거리가 가까워 인근 마을 주민들이 식량을 날라다 줄 때 이곳까지 접근하는 것은 허락했다. 식량보급과 정보전달의 요충지.
  • 소막골 아지트대원사 매표소 우측 200미터 지점에 있다.
  • 중땀 암반굴 아지트 삼장면 새재교회의 급경사 뒷산의 8부 능선 지역. 높이 1.5미터 깊이 4~5미터 넓이 2.5평정도의 아지트. 30명 정도 들어갈 수 있고 암반굴 안에 식수원이 있고 밖을 정찰하기에 용이하다.
  • 조개골 아지트삼장면 윗새재에서 치밭목산장 방향 1.2킬로미터 지점. 도당 주둔지 및 야전병원 장소였다.
  • 이영회부대 아지트거림마을 길상암에서 도장골 방향 700~800미터 지점. 돌로 쌓은 흔적이 있다. 다섯 층의 계단식이며 100여 평 정도 된다.
  • 이용요금-개인 : 일반(1,000원), 청소년·군인(700원), 어린이(500원)-단체(20명 이상) : 일반( 700원), 청소년·군인(500원), 어린이(300원)-입장료 면제 : 6세이하 어린이, 65세이상 노인. 국가유공자, 장애인, 공무수행자, 학술조사단(☞증명서 제시자에 한함)
  • 이용시간09:00 ∼ 18:00(동절기 17:00)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매년 1월1일, 설날, 추석
지리산으로 들어간여자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6.25 한국전쟁의 휴전성립 시까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던 북위 38도선. 이른바 ‘38선’, 외세에 의해 그어진 38선은 세계에서 유래 없는 민족의 비극이자 국민 전체에게 고통을 안겨 준 경계선이었다.

그 경계선이 나누어 놓은 것은 국토 뿐 만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크게 나뉘는 사상 투쟁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게 되었다.

그 서막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서울 대구 제주 여수 순천 등 대한민국 곳곳에서 동시에 올랐다. 그 중 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1933년 6월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난 정순덕은 순박한 시골 처녀였다. 그녀의 남편 또한 농사만 알던 시골청년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빨치산에 의해 지리산으로 끌려가면서 드라마 보다 더 슬프고 가슴 아픈 한 여인의 삶이 시작됐다. 사랑하는 남편이 보고 싶은 그녀는 남편을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간 그 산길, 그녀는 12년 동안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가 남편이 군경 토벌대의 총을 맞아 죽은 뒤에도 산을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지리산과 덕유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나 총을 들고 싸우기 보다는 밥을 하고 빨래하는 일을 맡았다.

군경토벌대는 정순덕을 잡으려 그녀의 친정아버지를 잡아다 심문하기도 했다. 친정아버지는 지리산으로 올라가 딸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딸을 찾아 헤맸다. 그녀는 산을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산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숨죽여 울뿐이었고 아버지는 그런 딸의 처지를 생각하며 땅을 치며 애통해 했다.

토벌대의 작전으로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사라지고 인원은 죽거나 체포되어 그 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1963년 11월 12일 새벽 1시 빨치산의 보급투쟁로였던 삼장면 내원리의 한 민가에서 산청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쏜 총에 대퇴부를 맞고 생포된 빨치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12년 전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던 여자 정순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잡혀 마지막 빨치산으로 기록됐다.

빨치산루트, 역사의길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과 토벌군의 활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이 중산관광지에 있다.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1층(역사실)은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 이전까지 이 땅에 '비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빨치산의 태동, 지리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빨치산 사건 등을 살펴봄으로써 빨치산의 실체와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공간이다.

2층(생활실/산청과지리산/소영상실)은 빨치산의 실체와 역사의 기초가 되는 빨치산의 생활을 알아보고 지리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통해 지리산이 간직한 역사와 자연경관, 산청의 문화관광자원을 알아보는 공간이다.

야외에는 전차, 장갑차, 헬기, 빨치산이 숨어 지내던 아지트 모형 등을 전시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잡힌 지리산 내원마을의 한 민가를 복원했는데 그곳에는 빨치산이 구들장 아래 숨어 지내던 이른바 ‘구들장 아지트’도 볼 수 있다.

산청군 내원사계곡, 대원사계곡, 중산리, 법계사, 소막골, 순두류, 조개골 등 빨치산 아지트가 있던 곳을 연결하는 빨치산 루트를 만들고 답사코스를 개발했다.

빨치산이란

빨치산의 사전적 의미는 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의 별칭이다. 빨치산과 발음이 비슷한 ‘파르티잔(partisan)’이 그 정확한 단어로 추정된다. 파르티잔(partisan)의 어원은 프랑스어 ‘파르티(parti)’이며 뜻은 ‘동지’ ‘당원’이다. 근래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유격대원’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이라고 불렸던 사람 또는 그들의 집단 이름은 ‘조선인민유격대’였다. 미군정이 남한에 들어서면서 남조선로동당이 탄압을 받게 되는 데 그들 중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라고 보면 된다.

이를 전후로 무장유격투쟁을 했던 ‘야산대’도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빨치산 부대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 세가 점점 확대되었고 1948년부터는 대한민국 여러 지역에서 빨치산이 활동했다. 빨치산 부대가 활약하던 여러 지역 중 한 곳이 지리산 유격지구였고 총사령관이 이현상이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고, 6.25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그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마지막 빨치산은 1963년 11월에 내원사 계곡에서 붙잡힌 정순덕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 빨치산은 모두 사라지게 됐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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