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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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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량스님 이야기
작성자 생비량면
내용 ■ 비량스님 이야기

산청군 생비량면 도리 양천강변에 가면 비량도사 유래비가 있다.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구전으로 전하는 얘기를 적어본다. 생비량이란 지명을 사용한 기록은 조선중기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생비량을 지나쳤다고 하고, 그 이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 그이전부터 생비량의 지명을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고려때 불교를 숭상하던 때라 곳곳에 사찰들이 많이 들어섰다.이곳은 신라초기에는 궐지현(闕 支 縣), 신라시대의 때는 궐지군(闕支郡)이라 이르던 것을 고려 초기에 강성현으로 개칭하였다. 강성현의 소속고을로 다스려 지고 있었을 것이다.지금의 산청군 생비량면 가계리 고송골 저수지 뒤쪽 일 것이라고 본다.아주 큰 사찰이 있었다는 것이다.그곳이 진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평소 그절에 왕래하는 신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스님들도 무척 많았고 주지스님의 법명이 비량 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현종때 큰 장마가 들어 강을 끼고 있는 그주변은 물바다를 이루어 백성들은 비량스님이 있는 절로 대피해야만 했다.어찌나 많은 백성들이 절에 숙식을 의지 해야 했기에 스님들 먹을 양식 조차 남기지 않겠되었다.
일부 스님들의 원성이 대단했다.백성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말이다.그렇지만 비량스님은 주민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이 먹고 없어면 같이 굶자고 했다.장마가 끝나고 백성들이 돌아가고 나니 스님들도 다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절에 있다가는 배곯아 죽겠다고 생각하고 한분 두분 스님들도 다 가버렸다.그렇지만 비량스님은 빈곤한 백성들을 위해 쌀 한톨이라도 같이 나누며 큰절을 혼자 지켜 나갔다.선행이 알려지면서 신도들이 늘어났고 다시 스님들도 많아지게 되었다.다시 절을 확장하게 된다. 그과정에서 주위에 살고 있던 뱀들이 죽게 되었다.이 원한을 갚기 위해 뱀이 여자로 둔갑을 하고 절에서 생활하게 된다.도량이 깊은 스님은 한눈에 뱀을 알아보았다.그렇지만 절대 내색을 하지 않고 신도들처럼 대하며 극진히 대접했다.그뱀은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지만 틈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너무나 극진히 보살펴 주니 차츰 원한의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일이 지나면 다시 뱀으로 변하는데 마지막 날 밤이었다.
스님은 그사실을 알아채고 성대한 법회를 열어 주었다.뱀으로 변하는 순간을 다같이 보면서 잘돌아가게하였다.뱀은 돌아가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뱀이 돌아간 그 골짜기를 독자골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어 지고 있다. 스님은 인근 고을의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스님 이었다.스님도 나이가 들어 영면 하게 되었다.제자에게 내가 죽어도 나를 위해 법회나 기도를 하지 말라 하였다.만약 그럴 경우 큰 화마가 닥쳐 이절은 없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이 소리를 들은 스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다른 스님들의 고집에 못이겨 크게 장례를 치루고 말았다.몇해 동안은 아무 탈 없이 번창해 갔다.그래서 큰장례를 치루자고 우겼던 스님들은 후하게 장례를 치루어서 이렇게 번성한다고 믿었다.어느날밤 제자스님 꿈에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는 것이었다.그 스님은 따라 가보니 예전에 보냈던 뱀이 따라 오라고 하면서 길을 인도 하는 것이었다.어느덧 따라 가다보니 시뻘건 불기둥이 절을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나를 살려주었구나.생각하고 다시 달려오니 이미 절은 다타고 없어지고 말았다.그 절자리는 밭이 되어 농사를 짖곤 하는데 불에탄 기와조각들이 지금도 나온곤 한다.그후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질때는 비량스님을 생각하면서
이지역을 생비량이라고 지명을 바꿨다는 것이다.비량스님이 죽지않고 살아 있어면 좋겠다고 생을 앞에 넣어
생비량이라고 불리어 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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