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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지명유래

읍면통합 - 마을지명유래 게시물이며, 제목, 작성자, 내용, 파일 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가계(가실,고송골,못안,방골)마을 이야기
작성자 생비량면
내용 가계마을 이야기

가계마을은 4개의 자연마을인 가실,고송골,못안,방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국도 33호선이 방골, 못안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송계를 지나는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진주갈려면 인근에서는 못안 마을 정류장에 와서 차를 타야 했다.1982년에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어 방화재를 넘어가는 도로는 마을도로로 사용하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1982년까지는 못안마을은 없는 상점과 식당이 없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2020년1월 현재 가계마을은 64가구에 104명이 살고 있으며,주로 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일할수 있는 인력은 인근 소각장 및 송계고등학교 등에서 일하고 있다.

마을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가실(可実 )마을은 양천강을 바라보며 뒷쪽에는 완만한 산을 배경으로 배산 임수가 잘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표본마을 이라고 할수 있다.
이동네에 터를 잡고 살게 된때는 아주 오래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인근 제보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도 사람들이 그때부터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합천 이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성씨들이 같이 살고 있다.전해내려오는 이야기는 마을입구에 큰 살구나무가 한그루 있었다고 한다.어찌나 맛이 있어 인근지역에서 살구를 훔쳐 먹을려고 밤만 되면 사람들이 모여 들곤 하였다고 한다.마을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살구 나무 때문에 동네를 버리겠다고 생각을 하여 고심 끝에 나무를 없애기로 하였다.그말을 전해들은 동네 여자들은 없애지 말아달라고 사정을 하게된다.살구가 익을때는 보리 수확철이라 힘들때 맛있는 살구 하나 먹어면 힘이 나곤 해서 극구 반대를 하였다.마을에서는 반대가 심하여 없애지 못하고 두고 있었는데 시주를 나온 스님이 살구 나무를 보더니 이나무를 없애지 않으면 마을에 화가 끼일거라고 이야기 하고 갔다.마을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두고 있었다.다음해 살구가 익어 갈 무렵 동네 아이들이 살구 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따다가 몇 명이 같이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다음 해에도 안좋은 일들이 또 일어났다.그래서 마을에서는 나무를 없애버렸다.그래서 맛있는 과일을 생각하며 가실(可実) 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고 한다.

고송골(古松谷)은 산골짜기를 따라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이동네에 터를 잡고 산지는 일제 강점기때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마을 뒤산의 봉우리가 깃대봉인데 크다란 노송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그래서 고송골이라고 불리어 지게 되었다고 한다.

못안마을은 지금의 도로가 나기 전 까지는 옛날 신작로가 있어서 큰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길을 따라서 20여개의 상점인,술독아, 정미소, 쌀집, 몇개의 구멍가계,철물점,옷가계,전파사,양복점,자전거방,술집이 있었다.최근 도로가 생기면서 다 철거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고 한다.백현동(白峴洞)이라고 불리어 지고 있었다.백현동이라 불리지게된 이유는 어진 선비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모습을 보고 인근에서 그마을을 백현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일제 강점기때 농사를 짓기위해 마을 앞에 못을 파게 되어 못안,또는지내(池內) 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방골마을은 20여가구가 골짜기를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논농사 및 밤나무농사를 하고 있다.마을 유래로는 진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지나가는 객들이 이 마을에서 자고 가곤 하였다.그런데 어느해 한 과객이 과거를 보러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기서 자고 가게 되었다.극진히 대접을 하였고 그 선비는 과거에 급제 하여 수령이 되어 다시찾아와 고맙다고 주인에게 치사를 하였다고 한다.돌아가면서 그집 담벽에 징표로 방을 붙여놓았다고 한다.그래서 그이후로 방골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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