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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작성한 <단성향교 설명문>
공개여부 공개
작성자 강**
내용 단성향교를 알아보려고 <문화관광-청정골관광-역사전통-문화재-도지정문화재-2번>을 보았습니다. 설명문이 쉽지 않아 이 향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알고싶어하는 포인트를 살려 제가 한 번 작성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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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강누리에 위치한 단성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 지내고 지방민을 가르친 옛 공립학교로서 조선시대에는 선생님이 30명이나 되었다. 이 향교 자체와 이 안에 있는 옛날 호적부(호적장적)는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다. 현재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인 석전(釋奠)을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고 있다.
단성향교는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출발 지점이다.
19세기 초 우리나라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가 문란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었다. 1861년 겨울, 관청에서 값이 싼 고을의 곡식(이무미離貿米)을 사두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고을에 12,900냥이 배정되었다. 그리고 하급 벼슬아치인 이서(吏胥)들이 탈세(포흠逋欠)한 27,000석을 충당하기 위해 곡식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선비들도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해 12월경에는 이 고을 현감 임병묵이 이무미 3,000석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도청 격인 감영에서 이 고을 현감에게 시정명령을 내렸으나 현감이 이를 시행하지 않자, 사족인 김령(金欞) 부자(父子)가 주도한 회의가 이곳에서 열린 뒤 분노한 사람들과 함께 관가로 향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장부를 불태웠다.
결국 현감은 파면되고 이 지역 사람들은 감영과 중앙의 비변사에 시정을 요구하여 이서들이 포흠한 곡식 14만 석을 탕감 받고, 그들에 대한 처벌을 약속받았다.
단성의 농민항쟁은 '진주민란', 임술(1962)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급기야 1894년 동학혁명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봉건사회를 해체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즉 우리나라 근대화 운동의 횃불은 이 단성향교에서 점화되었던 것이다.
이 단성민란이 다른 민란과 다른 점은 1. 최초의 민란이라는 사실, 2. 사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반란이라는 것이 농민 중심인 일반 민란과 구별되는 포인트다.
파일
작성일 2014.07.14
열린군수실 - 군수에게 바란다게시판 상세내용
담당부서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연락처
답변일자 2014.07.15
답변내용 ❍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문화재안내판 가이드라인 및 개선 사례집」에 따르면 안내문안의 본문 내용으로 연혁,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 보유하고 있는 주요문화재, 주요 관람포인트 등으로 세부 내용을 정하고 있습니다.
❍ 단성향교의 경우 건물 구조의 독특성이 문화재적 가치로 높게 평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 위원의 문안 감수를 받아 작성된 내용입니다.
❍ 문화재 안내 문안은 관람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귀하의 의견은 추후 안내판 교체 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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