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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무근
제목 제11사단장 최덕신 일족의 친북 행적
내용
제11사단장 최덕신 일족의 친북 행적 1
제11사단장 최덕신 일족의 친북 행적 2
1950년 빨치산 소탕 목적으로 창설된 제11사단장 최덕신을 아시나요?

6.25 전쟁 당시 산청,거창,함양 양민 학살사건의 주동자인 최덕신 일족이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그들의 친북 행적에 놀라움과 함께 분노를 느껴 함께 규탄하고자 글을 올립니다.

2019년 7월 6일 북한 평양공항에서 정부의 방북 승인없이 월북한 최인국(73세)이 입북 소감으로 "우리 가문이 대대로 안겨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며 또 그것이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늦게나마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 부모의 유지대로 조국통일위업 실현에 여생을 깡그리 바치려 한다”고 밝힙니다.

그가 말하는 부모님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봅시다.

먼저, 그의 할아버지 최동호는 독립운동가로서 만주에서 천도교 계열의 독립운동 학교인 화성의숙의 교장으로 김일성과 교우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해방후 김일성이 불러 가족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에서 승승장구한 자입니다.

당시 그의 아들인 최덕신은 대한민국 1대 육군사관학교 교장(박정희의 스승)과 이어 11사단장으로 이승만의 신임이 강하여 친부의 월북에도 별다른 문책없이 재임할 수 있었고, 견벽청야라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후에 양민학살 사건이 밝혀져 1951년 12월 고등군법회의에서 그의 직속부하 3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3년까지 (1년뒤 모두 보석으로 출소됨) 구형되었지만 최덕신 만큼은 직위해제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과 베트남 대사를 지내는 등 거칠것 없는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최덕신은 대통령의 스승으로 추앙되어 제9대 외교부장관을 역임하고 주한 서독대사로 파견하기에 이름니다.
거기서 동백림 사건이 터져 동베를린 등 서유럽에 유학하고 있던 지식인 200여명을 간첩으로 수사하게 되고, 박정희 정권은 최덕신에 책임을 돌리게 되어 이후 박정희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천도교에 영향력이 컷던 그는 당시 신도수 100만명의 대한민국 천도교 교령을 맡아 정부지원 등의 문제로 반발하여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미국에서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연이은 비판과 통제, 몇차례의 북한 방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은 최덕신은 1986년 아내와 함께 북한에 영구 귀국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직위를 맡다가 1989년 애국렬사릉에 안장됩니다.

1951년 산청함양지역 양민 학살을 지시한 내용을 보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고 명령한 당사자는 이 사건 이후 적의 아방궁으로 들어가 호가호위하며 그 자식까지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혜택을 받다가 월북하여 대한민국을 음해하는 등 그들 일족의 행적을 보며,
영문도 모른체 돌아가신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진 것 없이 고아로 힘들게 살아가신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직까지도 국가배상을 외치고 있는 오늘의 나(유족)를 보며....

기구한 운명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채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3대가 대비되어 서글픈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

유족회원님 모두들 건강과 가정의 화목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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