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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수호
제목 산청 함양 사건 (기본 자료)
내용
산청·함양 사건 /      유족회 이사 민 수호
 0.사건 개요
 
 
발생일시 : 1951. 2. 7. 06:00 - 18:00
장소 : 2개군 3개면 4개마을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내용 : 6.25.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 207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중 양민을 통비 분자로 간주 집단학살한 사건
(제 4대국회 제 35회 임시회 - 산청.함양.거창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 2인 : 1,818명 인명 피해)
사망자 및 유족 등록 사항(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 심의 위원회 결정)
사 망 자 : 386명 (산청 292명, 함양94명) * 유족회 주장 : 705명
유족 등록 : 732명 (산청 551명, 함양181명)
 
산청, 함양 사건의 역사적 진실과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
 
서문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조치 법] 의 근거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본 특별법이 제정 공포(1996.1.5.) 된지가 7년이 된 현 시점에서 이 자리 에서산청과 함양의 유족 대표로 학술대회의 토론자로 참석하여 공식 등록된 사망자386명과 (거창 : 548명, 산청.함양 : 386명) 유족 732명의(거창 : 785명, 산청.함양 유족 : 732명)
 심정을 대신하여 토론자로서 발표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어느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실로 착찹한 심정을 솔직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사건의 시작
(1) 11사단과 9연대 3대대의 작전 행로

1950.6.25.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9.25. 소위 전쟁 이전부터 준동하고 있던 빨치산 소탕 목적으로 육군 제 11사단이 창설되고, 사단장에는 최덕신 중장이 임명되고,9연대장에 오익경 대령, 3대대장에 한동석 소령 등이고, 사단 사령부 및 9연대,13연대,20연대 등은 미 9군단장의 작전 지휘를 받으라고 되어 있었다.
 
※국방부,한국전쟁사,제4권 전사편찬위원회 편,1971참조,김동춘교수 논문집,참조) 특히 11사단 9연대가 적개심이 촉발된 계기는
 
※ 1950년 11월 29일 남원의 사단본부의 참모회의에 참석하려고 지리산의 고동재를 넘던 미 군사 고문단의 리 대령, 장교 2명, 사병 28명이 적에게 공격당하여 사망하였으며, 이런 일을 당한 11사단 9연대는 공비들에 대한 더욱 강한 적개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후 남원에서의 지휘관 회의에서 어떤 사항이 논의 ,결정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더욱 강경한 초토화 작전이 수립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국방부 한국 전쟁사 59및 제4권, 전사 편찬 위원회 편, 1971.참조. 리영희 역정 나의 청년시대 참조, 김동춘 성공회 신학대학 교수. 거창 사건 학술대회(2000.10.21. 논문 참조.)
(2) 산청.함양 지역 대 토벌 작전과 양민 대학살
1951.2.5. 오익경과(9연대장) 한동석(3대대장) 은 경찰을 포함한 청년 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총 700명을 이끌고 신원면으로 진격하였던 것입니다.
 
※신원면에서 적을 확인 할수 없었던 3대대 주력부대는 빨치산은 흔적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하자 젊은 여성을 무차별로 성폭행하고, 노약자들에게 강제로 군수 물자 등을 동원케 하고,정보 장교 이종대는 노인, 부녀자 등을 현장에서 총살하는 등, 수복이라는 미명아래 아주 난폭하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951년.2월 7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연합 작전의 대 토벌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산청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건의 진행
제1진은 산청 방면에서, 제2진은 함양 유림 방면에서, 제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포위하여 지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화계, 주상, 자혜리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유림면 손곡, 지곡, 서주리 등 모든 주민들을 집결시켜 미친 듯이 무차별적으로 남.녀.노.소 어린이를 막론하고 처참한 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국회속기록 제35회 19,18쪽 및 김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거창사건 학술대회(2000.10.21.)논문집 참고)
당시중대장 소지품을 지고 같이 동행하였던 현재 생존자 최남철 씨의 중요한 증언으로,
 
※당시 1951.2.7.학살 사건 전날에(정월 초하루날)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에서 3대대 소속 부대 2개중대 병력이 오전 11시경 도착 주둔하였으며(1박), 그 중 다른 중대의 중대장 소지품 등(속칭 짐이라고 함)은 거창 사람이 지고 따라 왔었으며,
 
 "이 작전이 심상찮으니 이 사람들(군인들) 요구대로 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띔하여 주었으며, 다른 중대장이(당시 중위로 기억) "이곳이 가재입니까?" 라고 묻길래 "여기는 신 가재부락이고(현재는 수철 이라고 합니다) 가재부락은 저기 산 넘어 30리 정도 가면 가재 부락이 있다"고 말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 부대 지휘관의(3대대 소속 중대장) 요청에 의하여 우리 집에서 숙박을 하고,
 
학살의 시작
0.가현부락 핫살 시작
중대장 소지품과 먹을것 등을 지고 다음날 가재마을로 새벽 04시경에 출발, 동행하였으며, 이날 (정월 초이튿날) 가재마을 에서는 처참한 학살 현장을 정확히 목격하여 지금도 그 당시만 생각하면 몸서리 쳐지며, 가재 부락 학살이 끝나고 방곡으로 이동하여 도착하였을 때
 
 가재 부락 주민을 학살한 중대장을 불러서 지시사항이 제대로 안되었는지 알수는 없으나 무조건 구두 발로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하였으며, "그 사람이 내가 동행한 중대장보다는 높은 상관이나 고참장교가 분명 하다고 생각됩니다."
 
※(산청군 금서면 구아 부락 거주(당시는 금서면 신 가재 마을 거주함.) 최남철 73세 현재 생존자, 증언) 이리하여,
 
※산청.함양 의 대 학살은 1951년 2월 7일 음력 정월초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산청군 금서면 에 소재한 지리산 고동 재를 넘어온(신 가재부락) 3 대대 2중대 등의 병력은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 여 80세 증언)무조건 가현 부락에(당시는 가재라고 호칭됨) 들이 닥쳐, 주민들을 동네 앞 논들에 모이게 하고는, 무차별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강제로 내몰고, 가축을 내몰고, 무고한 양민을 집단 총살을 감행하였으며,
 0.방곡부락, 점촌 부락의 학살 시작
이후 방곡리 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무고한 주민을 정조준 하여 양민을 학살하고,(국회 속기록 ,제 35회 임시회)시체 위에다 불을 지르고, 총검으로 확인 사살까지 하였으며, 다음은 점촌 부락 마을 앞 하천 변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비무장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가현, 방곡, 점촌의 3개 부락 학살인원은 360명 정도임(국회 속기록 제35회 임시회 박상길의원 발언참고및,산청군 금서면 구아부락 최남철 73세.현재 생존자로서 당시3대대 2 중대장 동행자 증언(2001.11.2.)입니다.
 
약 1.5 ㎞ 정도 아래 위치한 산청군 금서면 자혜, 주상, 화계리 마을에 들이 닥쳐 가가호호를 돌며 호각을 불면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경호강변 논들과 동사 마당에서 주민 좌담회 한다며 빨리 빨리 집결하라는 국군 병사들의 독촉으로 설 명절을 맞고 있는 주민들은 놀란 마음으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마을 앞 얼음이 얼은 경호 강 빙판위로 도보로 집결하게 하여, 미리 구덩이를 파고, 주민들을 정렬 시켜, 눈을 감게 하고는 군, 경 가족들은 대열에서 나오도록 하여 선별하는 등 앞서 가현, 방곡, 점촌 등에서 행한 양민학살 만행과는 다른 방법으로 바뀌었음을 알수 있으며,
 
0.서주부락의 학살 시작
※서주리의 학살 만행은 11사단9연대 휘하의 화랑부대라고 하는 3대대의 부대가 시국 강연회 한다고 유림면의 손곡, 지곡, 서주, 금서면의 자혜, 주상, 화계리 등 6개 마을양민들을 아침 일찍부터 집결시켜 오후 늦게까지 눈감고 줄을 세운 후 기관총, 소총으로 정조준, 또는 ※수류탄으로 눈을 감고 줄서있는 양민 400여명을 처참히 학살하였습니다.(국회 속기록, 제 35회 참고.) 그리고는 시체 위에다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르고 ....
 
다음날 피해를 당한 친지와 가족들은 시체를 분간 할 수가 없어 입은 옷의 바느질 형태 등으로 자기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는 등(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 여 80세 증언) 실로 그 참상을 어찌 다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리 하여 소위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의 양민 대 학살은 장장※ 10여 시간 동안( 항도일보1984.4.21.거창사건에 가려진 2. 7 참사, 이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발표(2000.10.21.) 참조) 에 막을 끝으로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화랑부대) 병력은, 다음 이동지역은 산청을 경유한

 0.거창 에서의 학살 시작
※거창군 신원면 청연 마을에 진입한 날은 1951.2.9. 이였습니다(김동춘교수 논문집 참조) 이 날부터 계속 3일 동안 세상에 널리 잘 알려진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 처참히 자행되었습니다. 이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므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나치스의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능가하는 전 세계가 전율 할만한 학살사건 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제4대 국회 박상길 의원 발언 속기록)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와 국가 공권력
현재의 거창, 산청.함양 사건 특별법은 당시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 여당과 정부의 어려운 당정 협의와 거창, 산청.함양 유족들의 기나긴 투쟁과, 특히 거창 유족들의 투옥을 당하면서 까지 투쟁하여 쟁취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거창 유족 님과 이강두 의원님에 대하여 항상 깊은 감사를 드림니다.
 
거창 지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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