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산청군의회(임시회)
시천·삼장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회의록
제1호
산청군의회사무과
일 시 1999년 10월11일(월)
장 소 특별위원회 회의실
- 의사일정
-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 부의된 안건
-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10시45분 개의)
○조사반장 조종명 오늘 유족대표와 위원님이 바쁘신 중에도 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족들께서 우리 의회에 청원하신 것을 갖고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일단 조사기간은 내년 4월7일까지 6개월간 조사하기로 하고 보시다시피 여기 네 분 위원이 조사위원으로 위임을 받았습니다. 유족대표도 네 분이 오셨네요.
우선 조사를 해야 될 사항이, 내용은 청원 받은 것과 그런 내용만 대충 알고 있지 상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용을 들어보고 앞으로 조사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청원하신 분들이 바라는대로 잘 풀어드릴 것인가를 협의를 해 보고 확실히 답은 안 나오지만 본회의에서 의장님 말씀대로 계획을 어떻게 해야 될 건지 의논해 보고 상견례를 겸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인사부터 합시다.
유족대표가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족들께서 우리 의회에 청원하신 것을 갖고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일단 조사기간은 내년 4월7일까지 6개월간 조사하기로 하고 보시다시피 여기 네 분 위원이 조사위원으로 위임을 받았습니다. 유족대표도 네 분이 오셨네요.
우선 조사를 해야 될 사항이, 내용은 청원 받은 것과 그런 내용만 대충 알고 있지 상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용을 들어보고 앞으로 조사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청원하신 분들이 바라는대로 잘 풀어드릴 것인가를 협의를 해 보고 확실히 답은 안 나오지만 본회의에서 의장님 말씀대로 계획을 어떻게 해야 될 건지 의논해 보고 상견례를 겸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인사부터 합시다.
유족대표가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 정맹근 정맹근입니다.
작년 4월부터 유족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좀 정확한 부대이동 사항이나 작전명령이나 이런 정보는 전혀 입수를 못하고 있고 다만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3연대 대규모 토벌과정에서 그런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정보외에는 자료가 없고 여순반란사건이후로 지리산 전쟁이 끝나는 동안까지 시천·삼장지역에서 양민들이 죽은 숫자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먼저 MBC에서 방영된 것을 포함한다면 1,000여명 이상이 아니냐는 정도는 짐작입니다.
유족회로 구성돼 있는 사람은 그 지역에 살고 있거나 진주나 인근 지역에 연락이 되는 유족들만 190여명 정도입니다.
그 지역을 떠나서 원거리 생활을 하거나 살고 있는 분은 유족회 구성이 안돼 있으니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내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어쨌든 저희 유족들로서는 50년 동안 한 많은 세월을 산 분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새로운 2천년이라고 해서 별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입장에서 앙금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청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통주씨는 시천면 내공리에 살고 있습니다. 다음 정태호씨는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님입니다. 다음 이재천입니다. 유족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작년 4월부터 유족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좀 정확한 부대이동 사항이나 작전명령이나 이런 정보는 전혀 입수를 못하고 있고 다만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3연대 대규모 토벌과정에서 그런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정보외에는 자료가 없고 여순반란사건이후로 지리산 전쟁이 끝나는 동안까지 시천·삼장지역에서 양민들이 죽은 숫자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먼저 MBC에서 방영된 것을 포함한다면 1,000여명 이상이 아니냐는 정도는 짐작입니다.
유족회로 구성돼 있는 사람은 그 지역에 살고 있거나 진주나 인근 지역에 연락이 되는 유족들만 190여명 정도입니다.
그 지역을 떠나서 원거리 생활을 하거나 살고 있는 분은 유족회 구성이 안돼 있으니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내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어쨌든 저희 유족들로서는 50년 동안 한 많은 세월을 산 분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새로운 2천년이라고 해서 별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입장에서 앙금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청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통주씨는 시천면 내공리에 살고 있습니다. 다음 정태호씨는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님입니다. 다음 이재천입니다. 유족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방금 말씀을 해 주셨는데 청원한 내용에 보면 2가지 사건입니다.
위의 사건은 우리가 아까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6·25전후해서 생긴 양민학살 전 사건을 다 할 수는 없고 사건이 나타난 것, 그것을 집중적으로 얘기를 해야 됩니다.
다 밝히고자 하면 끝도 없고 우리가 먼저 예로 본 함평은 몇 사단, 몇 중대, 몇 연대, 소속했던 사람이 나오고, 지휘한 사람이 누구며 등이 전사자료에 확실하게 나오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불명확한 것 같아서 전문위원도 관계자료를 조사했는데 금서사건이나 거창 신원사건이라든가 이런 것은 확실하게 규명이 되고 벌써 그 때부터 국회에 거론이 되고 해서 해결된 사건인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서 활동시 어떻게 대응해야....... 사실이라는게 증명되어야 조치가 생깁니다. 사실 규명방법이 없어서 이런 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위의 사건은 우리가 아까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6·25전후해서 생긴 양민학살 전 사건을 다 할 수는 없고 사건이 나타난 것, 그것을 집중적으로 얘기를 해야 됩니다.
다 밝히고자 하면 끝도 없고 우리가 먼저 예로 본 함평은 몇 사단, 몇 중대, 몇 연대, 소속했던 사람이 나오고, 지휘한 사람이 누구며 등이 전사자료에 확실하게 나오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불명확한 것 같아서 전문위원도 관계자료를 조사했는데 금서사건이나 거창 신원사건이라든가 이런 것은 확실하게 규명이 되고 벌써 그 때부터 국회에 거론이 되고 해서 해결된 사건인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서 활동시 어떻게 대응해야....... 사실이라는게 증명되어야 조치가 생깁니다. 사실 규명방법이 없어서 이런 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증인 이통주 여순반란사건에서 6·25사건 전까지 생긴 사건을 말씀드릴까요?
○간사 서봉석 지금 뭐냐하면 특위가 구성되어서 특위조사반이 구성돼 있습니다. 조사반이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 6개월간 그것을 잘 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고 나중에 유족대표와 현장에 나간다든지 내용을 들으려 사무실에 나갈 때 더 충분한 자료가 있으면 모아 주시면, 저희들이 그런 말로 안 해도 자료로 내 주시면 채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바쁘고 하니 우선 이 활동을 잘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 유족과 의회 의원들이 협의할 것인가, 협력할 것인가 이쪽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야기는 듣겠습니다.
시간이 바쁘고 하니 우선 이 활동을 잘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 유족과 의회 의원들이 협의할 것인가, 협력할 것인가 이쪽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야기는 듣겠습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지금 이 부분은 미묘합니다. 미묘한 것이 저 자신도 마찬가지고 의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양하고 산청사건을 가지고 후배가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본청에 있을 때인 몇 년 전인데 그 때 저는 이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정권이 바뀌어야 해결될 것이다. 역시 YS정권이 들어오고 나서 입법화되었습니다. 그 사건때 저도 이미 입법화된 사건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제가 그 당시 5살 때인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그 현장에 갔었다고 합니다.
현장에 참석하고 나서 눈을 감으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혹시나 싶어서 보니 저도 눈을 감았더랍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이를 업어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마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라 해서 나갔는데 100m 가서 총소리를 들었다는 어머니 얘기입니다. 살고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떠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에 빨갱이었다 하면 빨갱이고, 안 했다면 안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을 했던 사람이 죽은 것도 있고 안한 사람이 죽은 것도 있고 그 당시 살았던 것이 다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고향의 경우는 거창사건을 일으킨 그 부대로 시간과 날짜만 다르지 한 부대입니다. 그것도 하면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물론 그 당시 강정희의원과 몇 사람의 유족이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래도 그 사건도 어려웠습니다. 명확한 가해자가 있고 명확한 자료가 있어도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고 느낀 건 제가 갖고 있는 책이 함평사건까지 포함해서 지금 6건의 책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 가면 거창사건에 대한 별도의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도 있고, 사무실책도 있는데 이 사건, 금서사건의 경우는 완벽하게 기술이 다 돼 있고, 국회속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접한 자료에는 삼장·시천사건은 일단 없습니다. 자료가 지금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이냐 얘기는 적어도 함평사건의 결과보고서를 보고 제가 느끼는 것입니다마는 적어도 그 당시에 삼장·시천에서 사건을 일으킨 군인이나 경찰은 어느 부대였고, 그 당시 적어도 책임자가 누구였고, 그것을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삼장 지서장이나 시천 지서장, 산청 경찰서장 한 사람이나 그 조차 안되면 지서 순경 그것도 안 되면 면직원, 하다 못해 그 지역에 있는 유족이 아닌 제삼의 인물의 어떤 객관적으로...... 유족들이 아무리 말해도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자료는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자료를 의회에서 전부 다 해 주기를 유족측에서 기대하신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아이가 계속 울어야 되는데 유족이 자료도 제시하고 그 자료를 의회로부터 확인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이지 의회에서 앞장서서 조사해 달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의원이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의원들도 바쁘고 특별위원회를 계속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조사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 어려움도 있고 의회에서 일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현실적으로 없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유족측에서 적어도 어떻게 하든지간에 제가 말씀드린 그러한 객관적인 증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두 번째 6·25때의 행위로 보아 유족측에서 볼 때는 그 사람이 죽일 사람일지 몰라도 그 당시 우익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현재의 주류입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그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일제시대에 순사하고 친일한 사람이 이박사정권 시대에도 주를 이루었습니다. 아직도 그것이 청산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원인은 우리가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되어 장상체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의원 입장에서 그 당시에 정부의 입장에 있었을 때 우익사람이 설사 그 사람이 좌익이 아니라도 좌익으로 몰아서 죽였을 때 그 사람이 좌익이라고 해서 죽였다고 하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익쪽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지금 유족입장의 눈치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료는 유족측에서 제시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빛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원님들의 견해는 어떨지 몰라도 제가 보는 견해는 그렇습니다.
의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주민의 입장을 수렴하는 입장에서 받아 들여진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우리가 데지 않고 먹도록 해 주느냐는 것은 상당부분 유족의 노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노력 없이는 위원이나 제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것이 나중에 적어도 함평군 이 정도의 자료는 내서 국회에 청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좀 지나치게 유족측에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함양하고 산청사건을 가지고 후배가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본청에 있을 때인 몇 년 전인데 그 때 저는 이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정권이 바뀌어야 해결될 것이다. 역시 YS정권이 들어오고 나서 입법화되었습니다. 그 사건때 저도 이미 입법화된 사건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제가 그 당시 5살 때인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그 현장에 갔었다고 합니다.
현장에 참석하고 나서 눈을 감으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혹시나 싶어서 보니 저도 눈을 감았더랍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이를 업어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마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라 해서 나갔는데 100m 가서 총소리를 들었다는 어머니 얘기입니다. 살고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떠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에 빨갱이었다 하면 빨갱이고, 안 했다면 안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을 했던 사람이 죽은 것도 있고 안한 사람이 죽은 것도 있고 그 당시 살았던 것이 다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고향의 경우는 거창사건을 일으킨 그 부대로 시간과 날짜만 다르지 한 부대입니다. 그것도 하면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물론 그 당시 강정희의원과 몇 사람의 유족이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래도 그 사건도 어려웠습니다. 명확한 가해자가 있고 명확한 자료가 있어도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고 느낀 건 제가 갖고 있는 책이 함평사건까지 포함해서 지금 6건의 책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 가면 거창사건에 대한 별도의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도 있고, 사무실책도 있는데 이 사건, 금서사건의 경우는 완벽하게 기술이 다 돼 있고, 국회속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접한 자료에는 삼장·시천사건은 일단 없습니다. 자료가 지금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이냐 얘기는 적어도 함평사건의 결과보고서를 보고 제가 느끼는 것입니다마는 적어도 그 당시에 삼장·시천에서 사건을 일으킨 군인이나 경찰은 어느 부대였고, 그 당시 적어도 책임자가 누구였고, 그것을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삼장 지서장이나 시천 지서장, 산청 경찰서장 한 사람이나 그 조차 안되면 지서 순경 그것도 안 되면 면직원, 하다 못해 그 지역에 있는 유족이 아닌 제삼의 인물의 어떤 객관적으로...... 유족들이 아무리 말해도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자료는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자료를 의회에서 전부 다 해 주기를 유족측에서 기대하신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아이가 계속 울어야 되는데 유족이 자료도 제시하고 그 자료를 의회로부터 확인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이지 의회에서 앞장서서 조사해 달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의원이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의원들도 바쁘고 특별위원회를 계속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조사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 어려움도 있고 의회에서 일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현실적으로 없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유족측에서 적어도 어떻게 하든지간에 제가 말씀드린 그러한 객관적인 증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두 번째 6·25때의 행위로 보아 유족측에서 볼 때는 그 사람이 죽일 사람일지 몰라도 그 당시 우익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현재의 주류입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그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일제시대에 순사하고 친일한 사람이 이박사정권 시대에도 주를 이루었습니다. 아직도 그것이 청산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원인은 우리가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되어 장상체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의원 입장에서 그 당시에 정부의 입장에 있었을 때 우익사람이 설사 그 사람이 좌익이 아니라도 좌익으로 몰아서 죽였을 때 그 사람이 좌익이라고 해서 죽였다고 하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익쪽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지금 유족입장의 눈치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료는 유족측에서 제시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빛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원님들의 견해는 어떨지 몰라도 제가 보는 견해는 그렇습니다.
의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주민의 입장을 수렴하는 입장에서 받아 들여진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우리가 데지 않고 먹도록 해 주느냐는 것은 상당부분 유족의 노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노력 없이는 위원이나 제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것이 나중에 적어도 함평군 이 정도의 자료는 내서 국회에 청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좀 지나치게 유족측에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전문위원님 좋은 말씀하셨는데.....
○김희수 위원 호적은, 그러면 사망신고된 호적확인은 다 하셨습니까?
○증인 정맹근 1차 확인은 했었습니다. 경남 도에다가 유족등록 신청을 냈었습니다. 그 때 호적을 확인했는데 그 당시가 전란통이다 보니 죽은 날짜에 제대로 정리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사망신고한 적도 있고, 몇 년 뒤에 신고한 경우도 있고 그게 같은 날짜에 돼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김희수 위원 예를 들어 우리가족 네 사람이 피해를 봤다 하면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 2명이 죽었다면 네 사람은 3년후에든지 1년후에든지 한 날짜에 사망 신고가 돼 나와질 것 아닙니까?
○증인 이통주 사망신고는 제대로 안돼 있습니다. 옛날에는 지방자치제는 면단위로 되어 있어서 면의회가 있었습니다. 5·16전에 제가 시천면 직원이었을 때 반천에 신랑이 죽었다고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망신고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이 부분은 현실하고는 전혀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그 당시 마음놓고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 당시에 죽었다고 해도 호적에 신고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되어야지 공부가 어떻게 되었냐, 뭐가 어떻냐 하는 건 현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그 당시에 죽었다고 해도 호적에 신고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되어야지 공부가 어떻게 되었냐, 뭐가 어떻냐 하는 건 현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증인 이통주 시천·삼장 사람들이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삼장 조의원도 계시지만 이게 시천에서 말 나온지 20년 정도 됐는데, 국방부 질의서에 내 이름이 실려서 산청경찰서에서 찾아오고 했습니다.
그 때 시천파출소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천에서 죽은 사람이 빨갱이냐, 대한민국이 잘못해서 그랬는데 국가가 책임져야 되지. 그 사람이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빨갱이를 하겠느냐, 그 사람 학벌을 챙겨보면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공산주의를 하겠느냐며 경찰서에서 이런 답변을 했는데 시천 유족회를 구성 해 가지고 유족회 명단을 조사해 봤는데 첫 번째 시천면장실 간담회에서 저보고 유족회장을 하라고 하는 걸 저는 직계유족이 아니고 또 우리 부모가 세상을 버려서 유족이라 손쳐도 돈이라도 주면 찾아갈까 다닐 시간도 없는 사람이라 해서 유족회장에서 빠져서 만나서 일만 하는데 동의했는데 명단을 시천·삼장에 모은다고 모은 걸 보니 삼장사람이 5명인가 6명이 들어 있어 삼장사람이 왜 이뿐이냐, 내가 알기로는 많은 줄 아는데 하니 삼장에서 물으니 없다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더랍니다.
제가 시천·삼장 합해서 동갑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계할 때 올라가서 삼장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시천에서 죽은 사람 조사하는데 삼장에는 5∼6명밖에 안 죽었느냐 하니 그 사람이 왜 6명 정도 죽어 몇 100명 죽었다고 하는데 겁이 나서 말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걸 들먹여서 뭐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하는 얘기에 무슨 말을 해서 득볼게 없고 말 안 하는게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 갔는데 삼장에서 챙겨보면 6·25이후가 아니고 시천사건은 6·25사건이 아닌 1949년도 난 것입니다.
여순반란사건때 지리산에 숨어서 살면서 그래 했는데 아까 내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게 3연대 안에서 아는 사람이 있든지 이렇게 해야 찾아 낼건데 3연대 그 석자만 알지 죽임을 당하기는 했고, 아까 번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돌아가라고 해서 100m 온 다음에 총소리가 나더라는 것도......
그 때 시천파출소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천에서 죽은 사람이 빨갱이냐, 대한민국이 잘못해서 그랬는데 국가가 책임져야 되지. 그 사람이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빨갱이를 하겠느냐, 그 사람 학벌을 챙겨보면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공산주의를 하겠느냐며 경찰서에서 이런 답변을 했는데 시천 유족회를 구성 해 가지고 유족회 명단을 조사해 봤는데 첫 번째 시천면장실 간담회에서 저보고 유족회장을 하라고 하는 걸 저는 직계유족이 아니고 또 우리 부모가 세상을 버려서 유족이라 손쳐도 돈이라도 주면 찾아갈까 다닐 시간도 없는 사람이라 해서 유족회장에서 빠져서 만나서 일만 하는데 동의했는데 명단을 시천·삼장에 모은다고 모은 걸 보니 삼장사람이 5명인가 6명이 들어 있어 삼장사람이 왜 이뿐이냐, 내가 알기로는 많은 줄 아는데 하니 삼장에서 물으니 없다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더랍니다.
제가 시천·삼장 합해서 동갑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계할 때 올라가서 삼장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시천에서 죽은 사람 조사하는데 삼장에는 5∼6명밖에 안 죽었느냐 하니 그 사람이 왜 6명 정도 죽어 몇 100명 죽었다고 하는데 겁이 나서 말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걸 들먹여서 뭐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하는 얘기에 무슨 말을 해서 득볼게 없고 말 안 하는게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 갔는데 삼장에서 챙겨보면 6·25이후가 아니고 시천사건은 6·25사건이 아닌 1949년도 난 것입니다.
여순반란사건때 지리산에 숨어서 살면서 그래 했는데 아까 내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게 3연대 안에서 아는 사람이 있든지 이렇게 해야 찾아 낼건데 3연대 그 석자만 알지 죽임을 당하기는 했고, 아까 번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돌아가라고 해서 100m 온 다음에 총소리가 나더라는 것도......
○조사반장 조종명 그것도 증언입니다. 그것도 기록해야 됩니다.
○증인 이통주 이게 근거를 잡는 건 일도 아닙니다. 세밀하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우익을 저지른 그 사람이 살아 있어도 말 안 합니다. 빨갱이라서 죽였다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근 7∼8년 정도 됐는데 그 때 시천면장 이대규씨가 있었습니다. 저한테 전화를 했길래 뭐 때문에 했느냐 하니 잠깐 내방에 오라고 해서 가니 동그란 감사패를 세 개 갖다 놨습니다.
시천면에 있는 젊은 청년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시천면의 그 때 특공댄가 뭔가 총매고 다니면서 경찰관에 협조하면서 지리산 빨갱이를 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 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30명 정도 되는데 그 사람들에게 6·25때 욕봤다고 감사패를 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이 좋은지 한가지 가려 달라는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살아 있는 사람이 내가 볼 때는 이가 갈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면장에게 얘기했습니다. 이 패 주면 안 된다. 당연히 고생하고 받아야 될 사람이 있지만 받아서는 안될 사람이 있다. 1949년도에 6·25는 생각도 안 하고 있을 때 소개를 했습니다.
빨갱이 잡는 사람이 사방 와서 흩어져서 남의 집의 아랫방에 형편없이 하고 사는데 1950년도에 아침에 농사를 지어 놓고 오후에 저물 때 나오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찍 올라갈 것 같으면 부인도 올라가고 했는데 나는 반천 중간에 올라가니까 150m, 200m 모퉁이에 가니 어떤 여자가 점심을 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꼬불꼬불 가는 데가 있습니다. 몇 m만 떨어져도 사람이 안 보이는 그런 정도의 곳이 있습니다. 한참 가다 돌아보니 내 뒤에 올라오더라고요.
거기 가는 사람 바쁜 사람 아닙니까? 바쁜 사람인데 내 뒤에 부지런히 오는 사람이 내 앞질러 갔습니다. 그 위에 가니 형편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여자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 여자는 지금 죽었습니다. 조그만 아이를 업었는데 그 아이가 시천에 있고 그 당시 특공대 하면서 총매고 반천에 가서 잠복근무하는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여자를 겁탈해서 몇 발새에 울고불고 난리더라고요. 나무가 있고 꼬불꼬불한 데가 있어서 몰랐는데 대충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서너살 먹었습니다. 그 아이가 커서 그 감사패를 주려고 하는데 몰라 놓으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감사패를 주려는 뜻은 좋습니다. 그러나 다 줘서는 안될 일입니다. 시천에 지금 총매고 한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3연대 행동을 거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체 말을 안 합니다.
그 이유가 근 7∼8년 정도 됐는데 그 때 시천면장 이대규씨가 있었습니다. 저한테 전화를 했길래 뭐 때문에 했느냐 하니 잠깐 내방에 오라고 해서 가니 동그란 감사패를 세 개 갖다 놨습니다.
시천면에 있는 젊은 청년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시천면의 그 때 특공댄가 뭔가 총매고 다니면서 경찰관에 협조하면서 지리산 빨갱이를 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 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30명 정도 되는데 그 사람들에게 6·25때 욕봤다고 감사패를 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이 좋은지 한가지 가려 달라는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살아 있는 사람이 내가 볼 때는 이가 갈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면장에게 얘기했습니다. 이 패 주면 안 된다. 당연히 고생하고 받아야 될 사람이 있지만 받아서는 안될 사람이 있다. 1949년도에 6·25는 생각도 안 하고 있을 때 소개를 했습니다.
빨갱이 잡는 사람이 사방 와서 흩어져서 남의 집의 아랫방에 형편없이 하고 사는데 1950년도에 아침에 농사를 지어 놓고 오후에 저물 때 나오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찍 올라갈 것 같으면 부인도 올라가고 했는데 나는 반천 중간에 올라가니까 150m, 200m 모퉁이에 가니 어떤 여자가 점심을 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꼬불꼬불 가는 데가 있습니다. 몇 m만 떨어져도 사람이 안 보이는 그런 정도의 곳이 있습니다. 한참 가다 돌아보니 내 뒤에 올라오더라고요.
거기 가는 사람 바쁜 사람 아닙니까? 바쁜 사람인데 내 뒤에 부지런히 오는 사람이 내 앞질러 갔습니다. 그 위에 가니 형편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여자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 여자는 지금 죽었습니다. 조그만 아이를 업었는데 그 아이가 시천에 있고 그 당시 특공대 하면서 총매고 반천에 가서 잠복근무하는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여자를 겁탈해서 몇 발새에 울고불고 난리더라고요. 나무가 있고 꼬불꼬불한 데가 있어서 몰랐는데 대충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서너살 먹었습니다. 그 아이가 커서 그 감사패를 주려고 하는데 몰라 놓으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감사패를 주려는 뜻은 좋습니다. 그러나 다 줘서는 안될 일입니다. 시천에 지금 총매고 한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3연대 행동을 거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체 말을 안 합니다.
○간사 서봉석 특위반 구성할 때 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양쪽에 다 가야 되는데 시천면민들이 스스로 얘기해 주면 특위 만들 필요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하시라는 이유는 내부적으로 우리 지역내 이런 쓰라린게 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때문에 밝히는게 힘이 듭니다.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이 정권이 끝나기 전에 저는 일단 기본적으로 특위보고서가 우리만 만들어지는게 아니고 전국에 몇 군데 됩니다.
이를 모아서 그 지역 의회만 해서 될게 아니고 다른 힘있는 분의 힘을 빌어서 하려니 핵심적으로 우리가 시간을 아끼면서 역할을 분담하자는 회의입니다.
이 정권이 끝나기 전에 저는 일단 기본적으로 특위보고서가 우리만 만들어지는게 아니고 전국에 몇 군데 됩니다.
이를 모아서 그 지역 의회만 해서 될게 아니고 다른 힘있는 분의 힘을 빌어서 하려니 핵심적으로 우리가 시간을 아끼면서 역할을 분담하자는 회의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유족이 두군데 사건 합해서 190여명이 되는데.....
○증인 이재천 단성도 일부 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걸 받아서 명단을 만들고 그것까지는 된 것이고, 시천 몇 명, 외공이 몇 명 목격자 진술을 받아 놓은 것이 있는지.....
○증인 이재천 총계적으로 신고된 분들만 194명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집단학살하고 나서 마을에 가서 쏴 죽이고 했다, 이런 것도 당한 사람이 누군가가 말해 주는 근거를 잡아야 합니다.
○김희수 위원 예를 들어 우리 아버지가 원리에서 세상을 버렸다 하는 유족들이 나와질 것입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예를 들어 모월모일 몇 시에 그 어느 장소에서 누구누구가 있고 본 사람이 나와질 것입니다.
○간사 서봉석 저는 1차로 우리 의회조사반에서 기간을 공고해서 위험을 무릅써야 되는데 여기 오신 유족대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접수할 분이 있으면 조사반도 유족신고 접수를 받았으면 합니다. 산청신문이나 경남신문에 내야 된다고 봅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유족회에서 받는 건 어떻습니까?
○간사 서봉석 1차적으로 그러면 유족회에서 하든지......
○증인 이통주 외공리 같으면 유족회 명단에 나와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라도에 살건, 부산에 살건 연락이 되는 사람은 연락을 하고 외공 같으면 그 당시 일을 당하고 지금 현재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유족이 모여서.....
의회에서는 이걸 해 놓으면 거들어서 협조해 주는 것이지 위원들이 알아서 조사할 수는 없습니다. 금서에서는 제복입고 서울 올라갔지, 거창에서는 그 때 면장한 사람을 때려 죽여서 징역간 사람이 있고.....
의회에서는 이걸 해 놓으면 거들어서 협조해 주는 것이지 위원들이 알아서 조사할 수는 없습니다. 금서에서는 제복입고 서울 올라갔지, 거창에서는 그 때 면장한 사람을 때려 죽여서 징역간 사람이 있고.....
○조사반장 조종명 원리에 관계되는 유가족 접수하고 아울러 그때그때 적어서 그 때 실황을 그대로 적고 들은대로 차이나는 걸 적고 기록을 해야 됩니다.
○간사 서봉석 우선 유족을 파악해야 하는데 전문위원과 김희수위원 얘기했는데 유족접수를 유족회측에 책이나 다른 참고자료를 다 도와 드릴테니 우선 방법은 산청신문 활용이나 유족회 총회등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유족 파악을 하고, 다음에 위원장님 얘기한 최소한 증인이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기간은 어느 정도 정해서.....
○김희수 위원 유족을 파악하면 피해자도 어느 정도 나올 것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기록을 하든지 녹음을 하든지.....
○증인 이통주 유족총회를 해서 이것저것 찾으면 증거로 삼을 자료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조사반장 조종명 일단 공고를 내고 해봐야 별 재미는 없을 것 같고 유족총회를 해 보고 거기에서 수소문하고 탐문하고 해 보고 효과가 작으면 산청신문에도 내고 유족총회를 해서 기금도 조금 있어야 됩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유족회에 앞장서는 사람이 출연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앞장서신 몇 분은 금전적으로 쓰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안 되고 유족총회라고 해도 일단 금서 건은 사실은 유족이 아닌 사람이 도와준 경우입니다.
강정희의원이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강정희의원이 여건이 좋았는데 강정희의원쪽에 좀 그 당시 말로 해서 좌익쪽에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강정희의원은 그 당시에 행동하기가 좋았습니다. 자기 친척들이 전부 우익쪽에 서 있으니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쪽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죠.
강정희의원이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강정희의원이 여건이 좋았는데 강정희의원쪽에 좀 그 당시 말로 해서 좌익쪽에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강정희의원은 그 당시에 행동하기가 좋았습니다. 자기 친척들이 전부 우익쪽에 서 있으니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쪽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죠.
○간사 서봉석 일단 기간을 대충 정해 봅시다. 이걸 준비하면 한달내로 할 수 있겠지요?
날을 잡아 들어가야 됩니다. 1개월내로 한다는 것은 총회날짜를 1개월 이내에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일이 마무리되어야 저희들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반증도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날을 잡아 들어가야 됩니다. 1개월내로 한다는 것은 총회날짜를 1개월 이내에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일이 마무리되어야 저희들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반증도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증인 이통주 한달 정도만에 가능한게 아니라 해야 되지요.
○조사반장 조종명 그리 해 보고 공고를 해야 되는지 판단을 해야 합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이게 예민한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물밑에서 최대한 조사를 하고 최대한 관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작용, 역풍이 불 수 있습니다.
○증인 이통주 시천에도 이 문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사 서봉석 회장님 이렇게 합시다.
여기 보면 지난번에 올렸던 자료가 있는데 제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이 자료가 반려되었습니다. 이유가 정확한 입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이 안에 의혹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에서 반려한 것입니다. 도에서도 전사에 나오고 또 이 내용하고 합치됐으면 거창사건등에 관해서 위의 금서만 가는게 아니고 시천도 올라 갔을 것인데 도에서도 심사했는데 일반 명단이고 신원증명 이런 걸 보니 심사위원회 위원들이 미흡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시천지구는 반려되었습니다. 그걸 우선 참고로 저희들은 자료를 갖고 있되 그 안에서 조사할 때에는 유족내에서도 아주 예민하게 소리 안 나게 압축해서 조사해 줄 필요도 있고, 다음에 문제가 뭐냐하면 사망 일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호적부 정리는 당시가 전시상황이니 경황이 없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죽임이 있은 이런 곳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입증이 되어야 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46년부터 50년말까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특위를 만들었지만 사실 49년에 3연대와 관계되는 것들만 다루게 돼 있습니다. 3연대와 관계되는 사건, 집단적으로 학살된 사람, 그런 내려오는 과정에서 죽은 일부 여기까지만 포함 범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족회 대표측에서 명쾌하게 아셔야 협력이 되고 일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지난번에 올렸던 자료가 있는데 제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이 자료가 반려되었습니다. 이유가 정확한 입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이 안에 의혹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에서 반려한 것입니다. 도에서도 전사에 나오고 또 이 내용하고 합치됐으면 거창사건등에 관해서 위의 금서만 가는게 아니고 시천도 올라 갔을 것인데 도에서도 심사했는데 일반 명단이고 신원증명 이런 걸 보니 심사위원회 위원들이 미흡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시천지구는 반려되었습니다. 그걸 우선 참고로 저희들은 자료를 갖고 있되 그 안에서 조사할 때에는 유족내에서도 아주 예민하게 소리 안 나게 압축해서 조사해 줄 필요도 있고, 다음에 문제가 뭐냐하면 사망 일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호적부 정리는 당시가 전시상황이니 경황이 없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죽임이 있은 이런 곳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입증이 되어야 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46년부터 50년말까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특위를 만들었지만 사실 49년에 3연대와 관계되는 것들만 다루게 돼 있습니다. 3연대와 관계되는 사건, 집단적으로 학살된 사람, 그런 내려오는 과정에서 죽은 일부 여기까지만 포함 범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족회 대표측에서 명쾌하게 아셔야 협력이 되고 일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인 이재천 우리가 조사해 놓은 것은 49년 7월18일 신천초등학교에서 집단학살했고 49년 7월22 덕산 원리 뒷동산에서 학살한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해야 됩니다.
○간사 서봉석 그 시기에 있었던 것만 포함을 시켜 별도 유족회에서 유족을 압축시켜 가지고 예민하게 해 주시고, 두 번째 혹시 증인으로 나설 분이 있는가, 우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이면 더 좋고, 단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분이 있으면 즉시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고, 세 번째는 유족대표는 특정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많이 만나는 쪽입니다. 그래서 서류를 보낼 때 편지로 가능하면 보내 주십시오.
매우 급한 시간변동 문제가 아니면 반장님 앞으로 보내 주시면 그 하나 하나가 서류로 되고 저희들도 답신으로, 기록으로서 남겨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고 그리고 유족대표를 만날 때 참고해야 될상 싶으면 그분에게 꼭 물어서 녹음을 해야 됩니다. 쓰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토론해 보도록 하고 요즘은 녹취할 수 있는 기기들이 많으니 약간 그 분의 위신이나 명예에 훼손가지 않는 범위내에서는 그런 녹취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분이 있으면 즉시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고, 세 번째는 유족대표는 특정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많이 만나는 쪽입니다. 그래서 서류를 보낼 때 편지로 가능하면 보내 주십시오.
매우 급한 시간변동 문제가 아니면 반장님 앞으로 보내 주시면 그 하나 하나가 서류로 되고 저희들도 답신으로, 기록으로서 남겨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고 그리고 유족대표를 만날 때 참고해야 될상 싶으면 그분에게 꼭 물어서 녹음을 해야 됩니다. 쓰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토론해 보도록 하고 요즘은 녹취할 수 있는 기기들이 많으니 약간 그 분의 위신이나 명예에 훼손가지 않는 범위내에서는 그런 녹취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안 되면 기록이라도 어느 장소에서 기록했다는.....
○전문위원 송귀준 함평군의회의 것을 보면 완전히 나와집니다. 경찰서장이 홍길동인데 홍길동인 내가 통비분자가 아닌 양민을 국군이 죽였다 하는 식의 확인입니다.
서위원께서는 녹취를 하라고 하시지만 녹취는 안되고 본인이 확실히 했다는 인감계를 붙여 주어야 합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못하니 며느리인 내가 시아버지의 지시에 의해서 시아버지의 구술내용을 썼다는 결론적으로 이런 자료가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안 되면 의회가 조사해서 나와도 결과적으로 남북대치상태에 있기 때문에 역풍가능성이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물밑에서 조용히 확실한 자료를 잡기 전에는 이 자료를 내기 어렵고 의회에서 사실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의회가 도와주고 싶어 접근했습니다만 어설픈 자료로 도와주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서주나 방곡의 사건도 어려웠습니다.
강정희의원이 적중한 것도 자기 쪽에는 좌익쪽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이 그렇게 바뀐 건 아닙니다.
서위원께서는 녹취를 하라고 하시지만 녹취는 안되고 본인이 확실히 했다는 인감계를 붙여 주어야 합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못하니 며느리인 내가 시아버지의 지시에 의해서 시아버지의 구술내용을 썼다는 결론적으로 이런 자료가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안 되면 의회가 조사해서 나와도 결과적으로 남북대치상태에 있기 때문에 역풍가능성이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물밑에서 조용히 확실한 자료를 잡기 전에는 이 자료를 내기 어렵고 의회에서 사실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의회가 도와주고 싶어 접근했습니다만 어설픈 자료로 도와주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서주나 방곡의 사건도 어려웠습니다.
강정희의원이 적중한 것도 자기 쪽에는 좌익쪽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이 그렇게 바뀐 건 아닙니다.
○간사 서봉석 그리고 유족회에서 고생해서 만든 자료집을 의원 모두가 한 권씩 다 받았습니다. 유족대표님들도 이 부분에 참고할게 많으실 것입니다.
특히 일정표에 보면 어떻게 진행돼 갔다는게 자료집 118쪽부터 121쪽까지 보면 나와 있습니다. 위원님도 참고할 때 순서가 어떻게 돼 가는게 일이 빠른지 충분히 봐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일정표에 보면 어떻게 진행돼 갔다는게 자료집 118쪽부터 121쪽까지 보면 나와 있습니다. 위원님도 참고할 때 순서가 어떻게 돼 가는게 일이 빠른지 충분히 봐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 이통주 하태호씨가 얼마나 애를 썼던지 그걸 찾아 냈습니다. 조재민이가 대대장이다 해서 전화를 하니 영감이 성이 났든지 3연대가 사람죽인거 양심선언해 달라 이렇게 하니 40∼50년이 지난걸 왜 들먹이느냐 하더랍니다. 시천·삼장 주민들이 올라오면 때려 죽일 것이다. 그리고 국방부에 전화했습니다. 조재민을 알고 있다고 전화를 하니 3연대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챙기니 조재민 사위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하태호씨가 전화해서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봐야 말을 안할 것이고......
○전문위원 송귀준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미군이 양민학살한 걸 보면 전부가 다 양민이 아니고 그 중에는 양민으로 가장한 북방군이 있어서 사살했다 하는 것입니다.
결국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말하신 그러한 경우에도 그거 뺄갱이를 해서 죽였다 하면 그 뿐입니다.
그 당시 여건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부정해 두고 지금 얘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 때는 부득이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통비분자이거나 스스로 빨갱이가 아니었는데 사실은, 결과적으로 하다보니 잘못된 것이다. 이런 증언을 해줄 수 없느냐? 이렇게 접근해야 되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만약 삼장이나 시천에서 접근하신 분들이 적개심으로 접근하면 아무리 특위에서 우리가 조사반을 구성했지만 보고서 자체가 안 되고 지금은 완전히 화해한 상태다, 나는 전혀 0.001%의 적개심도 없고 그 당시 우리의 선대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출발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시려면 손을 떼시는게 나을지 모릅니다.
결국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말하신 그러한 경우에도 그거 뺄갱이를 해서 죽였다 하면 그 뿐입니다.
그 당시 여건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부정해 두고 지금 얘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 때는 부득이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통비분자이거나 스스로 빨갱이가 아니었는데 사실은, 결과적으로 하다보니 잘못된 것이다. 이런 증언을 해줄 수 없느냐? 이렇게 접근해야 되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만약 삼장이나 시천에서 접근하신 분들이 적개심으로 접근하면 아무리 특위에서 우리가 조사반을 구성했지만 보고서 자체가 안 되고 지금은 완전히 화해한 상태다, 나는 전혀 0.001%의 적개심도 없고 그 당시 우리의 선대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출발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시려면 손을 떼시는게 나을지 모릅니다.
○김희수 위원 한풀이는 안 되고 원인규명을 해야 됩니다.
○간사 서봉석 6·25 전이기 때문에 이 부분자료를 찾아봐야 됩니다. 우선 유족들은 1개월내에 총회를 소집해서 여관방을 잡든지 해서 티 안 나게 지난번 명단과 더 압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주십시오. 길게 모든 일정을 다 이야기할 수 없으니 1차적으로 그렇게까지만 합시다.
의회에서도 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회에서도 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 이통주 마찬가지가 아니고 38선 이북에는 총을 겨루고 있어도 소도 주고 하면서 이남에는 왜 못 줍니까?
○전문위원 송귀준 사건에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내가 해결하는데 당신이 조금 손잡아 달라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부분은 참 민감합니다. 제가 행정부에 몸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간사 서봉석 저희들은 유족을 도와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도 속이 탑니다. 제가 대통령이면 빨리 해 줍니다. 아직 그 위치나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죽이고 싶어도 정말 참아야 합니다. 냉정해야 됩니다.
우선 당장 모든 일정을 유족회와 협의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이 유족이 1개월내로 조사하는 방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최대한 어필할 수 있는,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주시고 저희들은 각종 간접자료, 책이라든지 이를 중심으로 챙겨볼테니 역할을 분명히 나누어 그 자료로 다시 2차회의를 해서 위원들이 현지 구술도 듣고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우선 당장 모든 일정을 유족회와 협의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이 유족이 1개월내로 조사하는 방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최대한 어필할 수 있는,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주시고 저희들은 각종 간접자료, 책이라든지 이를 중심으로 챙겨볼테니 역할을 분명히 나누어 그 자료로 다시 2차회의를 해서 위원들이 현지 구술도 듣고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조사반장 조종명 사망하신 분들 재적등본......
○간사 서봉석 그런 것도 유족들이 알아서 하되 그런 것은 맨 마지막에 해도 됩니다. 유족을 우선 모아서 상황을 잘 설명해 줘야 됩니다. 산청군의회에서 특위 만들어진 것부터 구성이 어떻게 돼 가고.....
전문위원님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냉정해야 되고 유족들에게도 아주 좀 욕을 얻어먹는, 그렇게 밋밋하게 일을 해 나가야 됩니다. 욕을 먹는 경향이 있어야 이 일이 온당하게 가지 유족들이 나서서 손 걷어붙이고 때려죽이러 가자,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접근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은 상견례나 하고 배경이나 일정을 얘기했으니 참고하시고, 일정을 한번 더 얘기하면 4월7일까지 6개월간이 조사기간입니다. 이 조사기간에 모든 위원들이 다 관여하는 건 아니고 네 분이 하니 네 분들이 활동하는 중에 충분히 유족측에서 유리한 증거를 채택하도록 활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문위원님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냉정해야 되고 유족들에게도 아주 좀 욕을 얻어먹는, 그렇게 밋밋하게 일을 해 나가야 됩니다. 욕을 먹는 경향이 있어야 이 일이 온당하게 가지 유족들이 나서서 손 걷어붙이고 때려죽이러 가자,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접근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은 상견례나 하고 배경이나 일정을 얘기했으니 참고하시고, 일정을 한번 더 얘기하면 4월7일까지 6개월간이 조사기간입니다. 이 조사기간에 모든 위원들이 다 관여하는 건 아니고 네 분이 하니 네 분들이 활동하는 중에 충분히 유족측에서 유리한 증거를 채택하도록 활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다른 의견 없으면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1시 45분 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