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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의회 회의록

Sancheong Gun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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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산청군의회(임시회)

시천·삼장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회의록

제2호

산청군의회사무과


일 시 2000년 3월3일(금)

장 소 시천면사무소 회의실


  1. 의사일정
  2.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1. 부의된 안건
  2.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10시30분 개의)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앉으신대로 우리 산청군의회 청원심사특위에서 청원심사조사반을 구성했는데 조사반에서 하는 2차 회의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시천·삼장면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청원을 받고 청원심사 특위를 구성해 가지고 거기에서 조사반을 4위원을 선정해 가지고 조사반을 구성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번 회의를 하고 그 뒤에 유족회 여러분들께는 필요한 자료를 계속 조사를 해주시도록 부탁을 드렸고 또 위원은 위원대로 의회는 의회대로 관계기관에 가서 자료를 구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마는 오늘까지 특별한 조사가 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당시 상황에 관해서 좀 많이 알고 계시는 분을 모셔다가 거기에 대해서 될 수 있는대로 사실에 근거한 증언을 들어 가지고 다음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모임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전문위원이 얘기를 하실랍니까?  그리고 나서 또 서의원님이 국회에 갔다 오신 관계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증언이나 그 당시에 군대의 어느 특정한 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를 현재까지는 취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 당시 시대상황이 밥 해달라고 하면 밥을 안줄 수 없는 특수한 시대상황을 언급하고 또 증언자료를 해서 지금 정부기관이나 뒤에 억울함을 풀어달라 그러한 정도로 의회의 의견을 내기 위해서 오늘 증언하실 분들을 모셔놓고 또 유족회에서는 나름대로 모임을 가지셔서 유족명단을 확인하는 것을 마무리 짓는 그런 것 정도로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것이 속기는 합니다만 완벽한 속기가 안 되기 때문에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크를 이용해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먼저 서봉석 조사반 간사께서 지난번에 국회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경과를 잠시 보고를 듣고 증언을 듣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사 서봉석   사실 저희 지역이 상당히 조사를 하기가 까다로운 부분이 정규전, 게릴라전으로 또 6·25전쟁이 일어났던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자료 수록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저희들이 한 의견은 청원은 입법청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국회를 방문하게 되었고 1999년 10월경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지금 현재로 15대 국회에서 국방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해출신 허대범 사무실을 방문하고 허의원하고도 잠깐 면담을 했고, 그  비서관인 배영조씨는 출신지역이 다행히도 삼장면 서당출신으로 저하고는 대학교 동기입니다.  그래서 우연히 잘 되어서 자료를 4건을 부탁을 해놨습니다.  
  지리산 전투에서 비정규전인 관계 전투, 국방부가 보관을 하고 있는 전사관련자료 4종류를 부탁을 했고 근래 정치적인 변수가 16대국회에서 허대범의원이 진해지역 공천에서 떨어졌습니다.  탈락하다보니 국방부의 자료요청에 대한 협조가 상당히 미온한 부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아침에 재차 촉구하는 전화를 배비서관한테 드렸습니다.  그런데 2∼3일 후에 도착하는 자료중심으로 산청군의회로 보내주겠다고 아침 통화를 하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다른 의원들 말씀하실 분 없습니까?
  (\"없습니다\"하는 위원 있음)
  어떤 분부터 말씀을 하실랍니까?  편안하게 어떤 얘기라도 좋으니까.....
○증인 김상수   제가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원리 과수원에 가옥이 2집, 이웃집이 2집 있고....
○간사 서봉석   성함과 나이부터 밝혀 주셔요.
○증인 김상수   저는 김상수라고 합니다.  나이는 현재 57세입니다.  2집이 살고 있었는데  양민, 그 당시에 50∼60명이 될 것입니다.  집에서 내려다보면 그 당시에 동산에 올라오는 길이 한복판이 되어서 환히 다 보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오더니 길  5-60미터 옆에다가 구덩이를 파고 세워놓고  그 당시에 아우성이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거기서 원리 동점...... 
○증인 김상수 아닙니다.  옛날에 황찬구씨 과수원인데......
○조사반장 조종명   우농원 집터......
○증인 김상수   예, 조금 있으니까 2집 아주머니를 부르더니 우리 모친하고 이웃집 아주머니를 부르더니 물을 여다 달라 했습니다.  
김희수 위원   구덩이를 한 개 팠습니까?
○증인 김상수   2개 팠습니다.  물을 2동이 이고 가니까......
김희수 위원   누가 팠습니까?
○증인 김상수   구덩이를 자기들이 파고, 물을 갖다 부으니까 물을 퍼먹고 물 2동이가 모자라요.
○조사반장 조종명   그때 날짜를 대충 알겠습니까?
○증인 김상수   확실히 모르고 좌우간 여름철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49년 7월22일 되니까  그때쯤, 날짜는 확실히 모르고 하여튼 여름철이다.
○증인 김상수   물이 모자라서 요구를 하는 모양으로 물을 2동이 가져 오라 해서 갖다 주고 왔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총성이 나고 아우성을 치고 또 도망가는 소리가 나고 총소리가 굉장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증인 김상수   한 50·60명쯤......
김희수 위원   군인이 몇 명입니까?
○증인 김상수   좌우간 1개소대 병력 될 것입니다.  기관총하고 M1소총하고 가져온 것으로 압니다. 
○간사 서봉석   묶어 가지고 이동시켰습니까?
○증인 김상수   처음에는 묶지는 않았습니다. 
○간사 서봉석   대략 일렬로 세워 가지고.......
○증인 김상수   2줄로 세워 가지고.
○간사 서봉석   중간중간에 군인들이 민간인들 사이에 몇 명이나 됐습니까?
○증인 김상수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포위하고 옆으로 포위하고 일개 소대병력 될 것입니다.  구덩이를 판 것도 죽은 사람들이 판 것입니다. 
공용식 위원   구덩이를 판 분들이.......
○유족회장 정맹근   죽은 것이 그날.
○증인 김상수   수십차례 있었습니다.  네, 처음에는 총을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총소리가 안 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보니까 총에다 대검을 꽂아 가지고 우리가 군대가면 훈련받는 식으로 찔러총 해 가지고 돌려 세워놓고 눈을 감기고.
○조사반장 조종명   그날 전후해 가지고 여러 차례 있었다. 
○증인 김상수   네, 계속 있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어디서 사람들이 데려왔는지는 모르고?
○증인 김상수   데려온 것은 학교에 분부가 있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말하자면 학교에다 어디서 왔는지 모아 가지고 분류를 해 가지고 죽여야 할 사람은 데려와서 처음에는 총으로 사살했는데 그 뒤에는 총에다 착검을 해 가지고 찌르든지 총소리는 안 나고 주로 아우성만 들리고.....
○간사 서봉석   거기서 총이나 대검이외 다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없습니까?
○증인 김상수 있습니다.  대검으로 죽이다가 뒤에 죽창......
○조사반장 조종명   김상수씨한테 계속 물고 하실 것이 있으면 하시고 계속 물어보실 것이 없으면 다른 분들 얘기를 들어보고  또 김상수씨 얘기를 들어보고 이렇게 합시다. 
○증인 김상수   그 당시에 사살한 위치 근방에 있었으니까 제가 본대로 본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그럼 현장에 현재 다름 지점보다 많이 개발이 안됐기 때문에, 훼손이 안됐기 때문에 대략 추정할 수 있겠네요?
○증인 김상수   네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추정하려고 가니까 길도 나고 저수지 판다고 파뒤벼 가지고 그래서......
○간사 서봉석   뒤에 유골이 묻혀 있는 부근 이런데 상당히 구덩이를 팠기 때문에 범위가 나올 것 같고 그렇다면 근처 지점을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겠네요?
  다음에 저희 조사반에 그 현장을 안내 할 수 있겠습니까?
○증인 김상수   네.
공용식 위원   끌려간, 잡혀온 사람중에 아는 분이라든가 그런 분은 기억을 하지 못합니까?
○증인 김상수   그런 분을 직접 사살현장에 없었으니까 못 봤고 6-70미터에서 보니까 사람 얼굴은 잘 몰라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제 나이가 열네뎃살 정도 밖에 안되니까 잘 모르지요.
○간사 서봉석   그렇더라도 10살 넘으면 말을 할 수 있는 상당히 기억이 오래 간다고 보고 그런 기억은 충격적인 기억이기 때문에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증인 김상수   그렇죠 늘 그것이 안 지워지죠.
○간사 서봉석   그래서 이 조사반이 중시하는 것이 이런 특이한 경우에는 증언자의 증언이 뚜렷하다고 오래 간다고 기억을 하고 특히나 말을 배우고 나서 그 이후이기 때문에 자료 채록하는데 신빙성을 더해주는 그런 것 같습니다. 
김희수 위원   지금 원칙적으로 남북전쟁이 50년 6월25일인데 이것이 49년 7월이면 전쟁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인데 결국 이 사람들이 여순반란사건 토벌대 그 사람들이라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증인 김상수   그 당시에 3연대가 곡점 밑에서 무슨 연락을 받고 출동했다가 군대가 몰살했습니다.  습격을 받아 가지고 몰락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군인들이 그렇지 않았는데 1개중대가 몰락을 하고 난 뒤에 이 일이 발생되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
○간사 서봉석   원리 뒷산에 끌려온 분중에서 지역주민들로 추정되는 사람이 상당히 포함되었습니까?
○증인 김상수   제가 볼 때는 지역주민이지 딴데서 들어온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논에 논매기하다가, 산에 도로보행자, 젊은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잡아 가지고 조사했습니다. 
○간사 서봉석   연령 구성은 어땠습니까?  청년중심이었습니까?  나이먹은 사람까지였습니까?
○증인 김상수   여기에 청년층하고 나이많은 분들하고, 어린아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여자분들이 포함되었습니까?
○증인 김상수   네, 있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아이들도 봤습니까? 애들도 있었습니까?
○증인 김상수   애들은 없었습니다.  제가 본적은 없습니다.  왜 그것을 아느냐 하면 여자 시체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언제였습니까?
○증인 김상수   그 이후에 1차가 아니고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 시체를 대충 묻고 나서 우리집에서 냄새가 났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이웃집하고 같이 시체를 덮어주고 했는데 그렇게 해도 여우하고 개하고 노다지 낮이고 밤이고 뜯어 물고 다니고 그리고 눈에 벌얼건 불을 써고 헝겊조각이 온 천지에 널려 있고 여자시체는 봉골쪽으로 나무하러 가다보니까 여자시체가 나왔어요. 
○간사 서봉석   대략 기억하기로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대략 추정하기로 인원이 어느 정도나 됐는지 추정하십니까?  
○증인 김상수   그러니까 인원은 추정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총살하게 되면 총소리를 듣고 대충 알 수 있는데 소리가 안 나니까 그러니까 그 인근 나무하려 다니다보면 구석구석 시체였어요.  시체를 전부다 개, 여우가 물어가 이러저리 뜯고 다녔고 그 당시에는 마음대로 묻어줄 사람도 없어요.  분위기가.  그 당시에 어렸으니까 마음대로 다녔지만 나이든 분들은 마음대로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수백구 되었습니까?
○증인 김상수   수백구까지는 안되어도......
○간사 서봉석   우리 지역에 이와 유사한 진주 MBC 외공리 조금 밑에 소지골에 도로가에 표지석을 세워놓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때 제가 발굴 현장에 가보니까 아직까지 유골이 온전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앞으로 증언자의 정확한 진술에 근거해서 현지를 간다면 동행해주실 수 있습니까?
○증인 김상수   현재 유골이 나와 있을 것이고 일부 유골은 가족이 가져간 것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럼 김상수씨는 조금 있다 물어보시고, 최영렬씨가 오셨는데 최영렬씨 말씀을 들어보고 합시다. 
○간사 서봉석   말씀하실 때 성함과 연령, 당시의 직책을 먼저 말씀해주세요.
○증인 최영렬   저는 시천면 원리에 사는 최영렬입니다.  당시에 시천면의 산업계에 근무했습니다.  지금 현재 77세입니다. 
  아까 외공밑에 얘기인데 그 당시에 제가 직접 점심을 시켰습니다.  산업계 근무할 때......
○조사반장 조종명   날짜는 아시는대로......
○증인 최영렬   날짜는 모르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언제쯤?
○증인 최영렬   여름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49년 6월 그때 전후입니까?
○증인 최영렬   그 익년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49년 그때 것을 주로 말씀해주세요.
○증인 최영렬   그 근방 얘기가 나왔으니까 얘기합니다.  그 당시에 죽은 사람이 175명입니다.  175명인데 어떻게 해서 아는고 하니 면에 근무하니까 그 당시에는 산업주임이라는 제도가 없었어요.  그래서 군인이 하나오더니 산업주임이 계시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아마 산업계 얘기하는 갚다 싶어 되물으니까 내가  산업계 근무하고 있다 하니까 그러면 같이 가자해서 그 차에 탔는데 당시에는 김종원이라 해도 실물을 못 봤습니다.  그 당시 처음 봤습니다.  장갑차에 타고 차위로 사람 머리만 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장갑차라고 했는데 그 안에 앉아 있는 것이 누가 얘기하기로 김종원이다 했습니다.  그분은 데려왔는데 헌병대 차가 열몇대 되었습니다.  전부다 서울 시영버스였습니다.  거기에 175명을 직접 점심을 시켜라해서 외공리에 가서 점심을 시켜놓으니까 조금 있다가 점심 놔두라고 했어요. 점심을 놔두라고 했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람들한테 끌려가 차에서 사람들을 내뤘더만요.  여자도 있고 아들도 있고 심지어 여자가 올라갈 때 그 당시에는 흰고무신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 흰고무신을 신고간 사람이 내 고무신이야 차안에서 찾아 가지고 나와 가지고도 자꾸 밀고 하니까 신이 벗겨지니 그것을 다시 줘어 가지고 했는데 그 여자가 아를 업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양쪽으로 포위해 가지고 헌병들이 올라가니까 조금 있으니까 전부 총살을 놔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리에서 전부다 죽었습니다.  점심을 시켜놓은 것이 175명이기 때문에 그때 틀림없이 175명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50년 여름이면 군인이 안 들어왔는데도........
○증인 최영렬   그 당시에 밥을 시켜 주었기 때문에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부다 죽었습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덕산지역 관련 얘기를 해주시죠.
김희수 위원   그러면 서울시영버스를 타고 왔으면 우리 지역주민이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많네요?
○증인 최영렬   네, 그것은 이 지방 사람이 아닙니다. 
  3연대 중대본부가 덕산에 지금 현재 고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정보부라는 제도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보부라는 것이 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산림조합 창고였는데 지금 구장터 거기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수용하니까 200여명,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200여명인고 하니 수용소라 해 그때 전부 잡아와 취조하고 했는데 그 당시에 200명이었습니다.  살아간 사람은 몇 안될 것입니다. 
  거기에 그 당시에 포위한 사람이 김시곤, 그 사람이 육군대위였고 거기에 부관이 정해운 소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서부경남 단성, 배양, 입석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데리고 와서 취조를 했고 덕산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삼장사람도 말할 것도 없고 주로 취조를 거기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학살하고 죽인 것은 전부 거기서 죽였습니다. 
  심지어 남명선생 묘소뒤쪽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혹시 증언하신 원리지역이 지금 현재 고등학교 뒤쪽 그곳 지리를 잘 알고 계시는데 그쪽에서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런 증언할만한 것은 없습니까?
○증인 최영렬   거기에서 죽였는지 확실한 것은 모르고 구장터하는 거기서 선별해 가지고 데려가 죽인 것이 대개가 남명선생 묘소건너하고 원천에 있는 구장터하고 대개 2개소에서 많이 죽였습니다.
○증인 이원상   저는 단성서부 금만에 살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이원상이고 나이는 64세입니다.  제가 그 당시에 그때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3연대라 하는 부대가 와 가지고 사람을 논매는 사람, 길가는 사람, 사람이 보이는  것은 전부다 학교마당에 끌어 모아다가 좌담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 때는 6월 그믐이었습니다.  음력.  우리는 그때 덥다고 해서 학교마당에 놀다가 목욕을 하려 갔는데 목욕을 하면서보니까 학교에 군인들이 모아 가지고 우리도 오라고 그랬습니다.  가니까 하는 말이 자기가 선두에 선 사람이 하는 얘기가 우리는 직접적으로 들었는데 그때 나이가 어려놓으니까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  
  자기 말이 육군대위라 하면서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육군 김대위라는 사람이 여기 이 학교에 나쁜 사람이 있다 해 가지고 찾고 있다.  전부 사람들을 눈을 감으라 해서 그 때는 권총이라고 하지 않고 육칠포로 하늘에 3발을 싸고 다음에 4-5발 싸고 거기서는 사람을 안 죽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노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때가 지금 생각하면 1시나 되었습니다. 
  노끈으로 묶어 가지고 사람을 모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는데 덕산 구장터 거기로  집결했습니다.  그래서 그 간 사람들이 간혹 그때는 면원이라는 것도 없었고 가면 직일줄 알고 아무도 못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3∼4일만에 거기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날 죽은 사람들은 7∼8명되었는데 어디서 죽었느냐 하면 덕산 어디가 죽였다 하더라고.  그 뒤에 죄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전부 짐을 져주었다, 쌀을 여남되, 스무되 주었던 사람들은 살아남고 순수하게 죄없는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참, 그때가 12살인데 국민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지역은, 그 지역이 알고 보니까 죽은 장소는 어디냐 물어보니까 덕산 국민학교 뒤에 가서 죽였다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증인께 한 두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모아놨던 위치하고 현재 학교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증인 이원상   금만초등학교입니다. 
○간사 서봉석   부친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증인 이원상   우리 아버지는 이자 한자 수자입니다. 
○간사 서봉석   그리고 그 뒤에 다시 부친의 유골은 수습을 하였습니까?
○증인 이원상   못했습니다. 
○간사 서봉석   현장을 가본 적이 있습니까?
○증인 이원상   안가보고 말았습니다.  그때 찾아갈 이유도 없고 해서 못가봤습니다. 
○간사 서봉석   혹시 그때 나일론 의류가 있었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런 것은 못봤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그때 6.25전쟁이전이네요?
○증인 이원상 네,  그 이듬해에 6.25가 났습니다.  우리가 졸업하고 난뒤에 6.25가 났고 그때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눈을 살짝 떠보니까 대위라는 사람이 장떠는 그것을 둘러쓰고 사람을 손짓하면서 묶어라고  거기서 죽일줄 알았는데 그때 안죽이고 그냥 묶어 가지고 전부다 데리고 가버린기라.  지금 거기 가서 죽은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여자도 한분이 계셨습니다. 
○간사 서봉석   그분들이 다음번에 저희들이 자료 얘기할 때 혹시 현재 부친외 성함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증인 이원상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죽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다음에 구체적인, 조사반에서 구체적인 자료요청을 하면 하시겠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렇다면 얘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간사 서봉석   저희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보된 자료가 있으면 다음번 저희들이 방문하거나 저희들이 공문을 내서 조사할 때 협조해주겠습니까?
○증인 이원상   네, 가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그 부분은 유족회측에서 책임을 하지요.
공용식 위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육군김대위라는 사람이 데리고온 군인들이 수시로 왔습니까?  그날 한번 왔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 뒤에 몇 차례 왔습니다. 
공용식 위원   몇 차례 왔을 때 주민들을 다 모았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데려가지는 않고 그랬습니다. 
공용식 위원   맨 처음에만 모아서 잡아갔고.
○증인 이원상   네.
공용식 위원   알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때 김대위 일행이 금만뿐만 아니고 그 밑에 백곡뿐만 아니라.....
○증인 이원상   백곡도 가고, 배양도 가고 많이 다녔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도처에 다니면서 그 사람들이 선별해 가지고 다른 쪽으로 데려가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더라고.
○증인 이원상   그 당시에 3연대 그 사람들은 사람만 보이면 무조건 끌고 왔는데 덕산으로  외지에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덕산으로 끌고 와서 뭘 어떻게 했는지 전부다 죽였지 뭐.
김희수 위원   그러면 그 당시에 소위 말하는 지방 빨갱이라는 사람이 우리 지역에 있었습니까?
○증인 이원상   있었습니다. 
김희수 위원   주로 지방빨갱이라는 사람들이 활동은 어떤 식으로 했습니까?  총칼들고 유격전을 했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것까지는 모르고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꼬여 가지고 심부름을 한 것 같습니다. 
김희수 위원   식량을 줘주든지?
○증인 이원상   네.
김희수 위원   그럴 것 같으면 지역의 생김새로 봐서 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말하는 부역을 했다손치더라도 단성이라든지 증언자께서 살고 계시는 금만 이런 쪽은 거리상 부역하기 어려웠는데 이유도 없이 거기까지 찾아와서 주민을 연행하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증인 이원상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증인 김상수   그 당시에 3연대8중대가 출동을 나갔는데 연락을 받기를 양민이 한 것도 아니고 산에 있는 사람들은 공작해 가지고 곡점위에 공비가 나타났다, 허위보고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중대가 나갔는데 곡점밑 못티 거기에 한 사람, 1∼2사람이나 살아가고 몰살했습니다.  
  그 이후로 밖으로 다니면서 논매는 사람, 길가는 사람, 젊은 아주머니, 아이들 놔두고는 눈에 걸리는 것은 다 잡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가 볼 때 그 골짜기는 전부다 공비다 자기들 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보복을 한 것 같아요.
○간사 서봉석   이원상씨한테 한가지 묻겠습니다.  단성면 자양, 백곡, 입석마을중에 그 당시에 증언을 해줄만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증인 이원상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우리 지역만 알고 있는데 그 현장인 학교마당에 끌려가서 4∼5시간 땀을 흘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네 알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정맹근 유족회회장님께서 그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하정쪽도 좋고, 원리쪽도 좋고 말씀을 해주세요.
○유족회장 정맹근   저는 천평리에 살고 있고 유족회장을 맡고 정맹근입니다.  현재 57세입니다.  그 당시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 당시에 사정을 잘 기억을 하지는 못합니다.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로는 그 당시에 주로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날짜를 모르는데 제사지낸 날로 따져서 치면   모퉁이에서 살아난 날짜가 양력 49년7월18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조금 전에 김상수씨가 증언을 했듯이 누가 제보를 했는지 모르지만 아군 3연대에 중산리쪽에 공비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토벌하기 위해서 장장 아군병력 3트럭이 설통바위 모퉁이에서 전몰을 당했습니다.  그날 이후 곡점근처에 있는 주민들을 신천초등학교에 모았습니다.  거기서 돌아가신 분중 장경상씨는 그 자리에서 살아 나왔다가 3년 전에 돌아가신 장경상씨 얘기를 들어보면 남로당 나오고, 북로당  나오라 하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남로당이 뭐냐고 하니까, 야이 새끼야 남쪽에 살면 남로당이지 그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이 지역이 남쪽에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간 사람은 총싸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7월22일 덕산초등학교에 인민군에게 복역한 사람은.....
○조사반장 조종명   죽은 사람 숫자는?
○유족회장 정맹근   죽은 사람은 20∼30명 정도 됩니다. 
  7월22일 시천, 덕산초등학교에서 인민군에게 복역한 사람은 자수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죄가 무거워서 도망간 사람은 살았고 죄가 없다고 자수한 사람은 거의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7월22일 중산리 신촌마을과 동당마을에 전부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7월22일 상부5개리 불을 다 질렀습니다. 
○유족회장 정맹근   신천마을과 곡점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너른바구부터 신천마을까지 불을 지르고 신천마을에 있는 주민들이 마을에서 5-6명을 죽이고 마을앞 근처에서 2명을 현장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손봉우씨 모친 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이고 하니까 무서워서 아래채에 숨었다 그랬는데 불이 나고 나서 보니까 치맛자락이 보이니까 손봉우씨 모친이더라고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지금 정맹근 증인께서 말씀하신 학살했던 군대가 불을 질렀던 곳과 학살했던 지역을 대충 말씀하신 곳의 현장을 알고 계시겠죠?
○유족회장 정맹근   네, 알고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다음에 현장을 나갈 때 자료나 이런 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 관계는 정맹근회장님이 날짜별로 말하는 것을 해 가지고 정확하게 순서가 안 맞고 그렇기 때문에 서면으로 써 가지고 말씀해 주십시오.  최영렬씨가 말씀하신 것을 종합해 가지고 가급적이면 진실에 가깝도록 인원이나 부대명이나 날짜가 오전이면 오전, 오후면 오후로, 불 낸 것 이런 것까지 그렇게 해주시고......
김희수 위원   최영렬씨한테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당시에 시천면사무소에 근무하였으니까 그 당시 사망신고나 이런 것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증인 최영렬   이것은 호적 날짜별로 안 했기 때문에 호적한 것은 신고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어서 위에 신원증명을 붙여 가지고 신고하는 것이 많은데 호적증명은 구구각색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김희수 위원   물론 한꺼번에 수십명, 수백명까지 집단처형되다보니 신고할 사람조차 없었던 것은 이해됩니다만 가까운 일가친척도 없고 이웃도 사람도 없고 하다보니 신고를 받았고 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래도 면사무소에 있는 공무원들이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겠습니다마는 얼마만큼 공무원의 자세로 있었다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사고나 난 뒤 파악을 해서 사망신고라든지 전혀 하지 않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증인 최영렬   당시에 사무실도 없었고, 면직원이 근무하는 자체가 근무도 못했습니다.  사무실이 없으니까 불을 질러버리고.....
○조사반장 조종명   그 때는 사무실이 있지 않았습니까?
○증인 최영렬   그 때는 좌왕우왕하니까 행정조치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오늘, 내일 군인들 수발하느라고 일반 조장행정은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사무실은 그 뒤에 있었고 그 뒤에 있어도 사무실이라고 맨날 나오면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군인들한테 잡혀 있었으니 일반 조장행정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까 설통바위에서 죽은 것이 37명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 당시에 산업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골함을 만들어달라고 그래서 사리에 가면 박삼제가 있습니다.  몇 개 만들어 달라고 하느냐 하니까 36개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뒤에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해서 37개를 만들어 3연대에 납품한 사실이 있습니다.  군인들이 죽은 것은 37명입니다. 
○간사 서봉석   그 부분은 저희들이 입수한 자료에도 동일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혹시 그외 그 당시에 생존한 장경희외 다른 분들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면 혹시 그 당시 3연대 정보원이라든지 이런 것은 저희들이 최대한 보안을 지키는 선에서 속기를 공개를 안 하는 선에서 유지되니까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유족회장 정맹근   그 당시에 현장에서 생존해 나온 사람은 장경희씨 밖에는 아는 분은 없습니다.  장경희씨가 3년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곡점국민학교 그 당시에 선생님이 2분이 꿇어앉아 고생하셨다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2분중에서 조성규선생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간사 서봉석   혹시 그 분 소재지를 알고 계시거나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현재 진주에 거주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소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간사 서봉석   3연대가 활동하면서 지역사람을 정보원으로 썼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은데 혹시 그런 부분도 사람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더라도 아는 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우리지역 시천·삼장에 거주하는 분중에서 3연대정보원으로 활동하신......
○유족회장 정맹근   제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이재천시 하실 말씀 있습니까?
○유족회 총무   이재천 없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김상수씨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증인 김상수   제가 군대 군사정보부에 있다가 제대했는데 예하부대는 그 당시에 2과라고 해 가지고 정보원을 각 분대마다 4-5명 티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지원을 받아 가지고 정보원이 조사하고 무조건 각 부대에서도 조사하고 하는 것을 보면 타부대에서 지원을 받아가 다른 정보원이 와서 일 저지른 것 같애요.
○간사 서봉석   유족회장님 한가지 묻겠습니다.  지금 시천면 반천리에는 하루저녁에 제사가 집단으로 든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가구수나 회장님이 알고 있는 인원수를 말씀해 주세요.
○유족회장 정맹근   반천마을에는 7월22일 18명으로 들었습니다.  18명이 제사가 한날저녁에 들어 있고 삼당마을에 7월22일날이 9명이 하루 저녁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 장날은 덕산시장 생선이 바닥이 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현재 그분들 유족들이 살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어릴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김희수 위원   지금 불확실합니다마는 가해자 즉 군인들에  알고 계신 명단이 김대위, 김시곤, 정해운이 나왔습니다만......
○유족회장 정맹근   제가 어려서 들은 얘기입니다만 조재미라는 분은 부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어른들이 수년 전에 소재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대전에 살고 계신 것을 찾았는데 어른들이 당시에 그 상황을 증언을 안해 주면 유족들을 데리고 와서 때려죽이겠다고 얘기했다고 했는데 그분들이 대전에 살지 않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8중대 대장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증인 최영렬   그 당시에 지위가.... 지씨인데 지중희였습니다. 
○간사 서봉석   여기 최영렬씨나 유족회장님이 대대장이나 중대장이름도? 
○증인 최영렬   대대장은 영급이라는 것만 알고 있고 지중희는 역시 중위였습니다.
공용식 위원   김시곤은?
○증인 최영렬 대위였습니다.  정보부장 
○조사반장 조종명   소속이 3연대 위에 무슨 소속인데.....
○간사 서봉석   그것은 국방부기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더 물어보실 것이나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김희수 위원   유족회측에서 그 당시에 지휘관을 찾고 있다는 것이 조재미라는 대대장으로 증언으로 들었고 사람이름이 3∼4명이 나왔는데 다른 분들은 찾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그 분들 증언이 상당히 공적인 신뢰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유족회장 정맹근   세월이 많이 흘러 가 버렸고 그 당시에 와서 주민들이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찾으려고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고 그 당시에 부대에 살고 있던 사람이 중산리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성함은 기억을 못합니다만 그분을 추적했더니 옛날 60년대 여기에 와서 자기가 그런  얘기를 많이 했더라고요.  내가 3연대 있으면서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내가 이 장소에 와서 살게 될줄은 몰랐다 해서 그 분은 찾으려니까 중산리에 살다가 반천에 살다가 20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없습니다. 
○간사 서봉석   그분 성함이 기억납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지금은 기억을 못합니다마는 성함을 알 수는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다음에 자료로 제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사반장 조종명   이름도 가급적이면 알 수 있는데까지 정리가 될 수 있도록.....
  그러면 말씀하신 분 더 하고 싶은 것이나 묻고 싶은 것 있습니까?
공용식 위원   저는 회장님한테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혹시  지역별로  명단이나 죽음을 당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그런 것은 파악해본 것이 현재까지 얼마 있는지를 혹시? 
○간사 서봉석   당시에 사망자명단을 저희들이 확보해서 맟춰 놓은 자료가 있습니다.  그 자료를 제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오늘 진상조사를 하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서 오히려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송구스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앞으로 이런 여러 가지 자료들로 채집을 해야 되겠고 또 유족회쪽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의회하고 같이 다시 한 번 처우를 국회하고 국방부하고를 방문해서 그 당시에 가해자쪽 사람을 찾아서 명단이 나왔고 이분들도  세상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어린 나이에 현장을 목격하신 분들도 초로에 접어들어 세상을 버렸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혹시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마음이 바꾸어 증언을 해줄지도 모르니까 같이 노력을 해서 찾을 수 있는데 까지 찾도록 합시다. 
○유족회 총무   이재천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천면 이재천입니다.  현재 유족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갓 낳아서 잘 모르는데 어른들의 말씀을 대충 들었고 제가 책을 보니까 여순반란사건에 대해가지고 제목은 붉은 까마귀입니다. 
  거기에 보면 신천국민학교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덕산국민학교까지 양민을 학살하고 구례 함양 거기서까지 학살한 것을 그 유족 한 사람이 함양에 거주하면서 서울대법원 공수부장인 자기가 직접 조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붉은 까마귀라고 자신이 유족인데 한이 쌓여 가지고 조사를 해 가지고 소설을 써 놨더라고요.
  그래서 하나의 증언이 될까 싶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 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유족회 총무   이재천 책이 5권인데 제가 확보해 가지고 있는 것이 3권까지이고 4,5권은 구할 수 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 책을 확보하시고 필요한 것은 복사를 해주세요.
○유족회 총무   이재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여담인데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적군이 우리를 아군이나 양민을 죽인 것보다 우리 아군이 양민을 죽인 숫자가 다 많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저도 이정도까지 심각했다, 특히 아까 증언하신 내용중에 대검이나 죽창을 가지고 양민을 학살했다는 얘기는 상당히 소름끼치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전쟁이라는 것은, 그때는 본격적인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젊은 우리들이 책에서 배운 것으로는 50년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 군인이 양민을 학살할 수 있었는지 상당히 분노가 앞서는데 지금 유족회에서 저희들이 우리 오늘 온 것은 산청군의회에서 왔습니다만 의회쪽에서 좀더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유족회장 정맹근   구체적인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엄연히 피해자인데 가해자는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데 50년이 지난 오랜 세월이다 보니까 사람마음속에 기억이 사라져 가고  그 당시에 현장을 목격하고 목격했던 사람이 안 계신 사항이라 물증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족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합니다.  중앙요로에 많은 탄원서를 내고 했습니다마는 진정서를 냈습니다마는 전사자료가 없다, 국방부처가 할 일이다 소멸시효가 지났다 하는 정도의 회답을 합니다.  우리가 현지에 가서 직접 자료를 열람하고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의회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고 그리고 아까 말씀중에 이 지역주민이 공비가 있다는 것은 저도 더러 있었던 것을 인정합니다마는 49년 7월 이전에 이 지역주민이 공비가 된 것은 없지 않느냐, 저는 저의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삼촌은 공비였습니다.  양민이 복역을 했다고 해서 죽이는 나라가 사회에 어디 갈곳이 산으로밖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결국 공비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살아남기 위해서 공비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따져보면 당시 책임자가 엄청난 문책을 당해야 될 상황입니다.  
  양민을 학살하지 않았으면 지리산 전투가 오래 끌지 않았고 순수한 양민을 공비로 몰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악순환을 저질렀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김희수 위원   사실은 이런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것도 불과 몇 년 안됩니다.  이전에는 군사정권 때는 바로 사상법입니다.  이런 문제를 꺼집어낸다는 자체가......
○간사 서봉석   시대의 흐름에 만시지탄이 있습니다마는 지금까지도 흩어져 있던 자료를 유족들하고 오늘은 2차회의입니다만 앞으로 여러 차례 회의를 가지고 의회와 유족회가 같이 노력을 하고 협력해서 조금 더 좋은 자료가 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제가 여쭙고싶은 것은 좀 우리 입장에서 증언자를 좀더 특히 원리지구 신천지구에 확보를 해주셨으면 다음 회의때 생생한 기록이 남지 않을까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유족회장 정맹근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이것은 제가 너무 앞서가는 얘기입니다만 양해해 주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쪽 우농원 뒤쪽에 학살장소를 대강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거기는 다음에 계기가 되어서 발굴했을 적에 사후수습관계, 유골이 틀림없이 나올 것인데 그 사후수습관계를 어떻게 유족회에서 하시겠습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저도 김상수씨를 만나고난 이후에 사망장소가 거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보니까 도로가 나있고 사람 집이 있다 보니까 마당인데 이런 사항이 있고 발굴을 할 수 있겠는가는 생각이 들고 처음은 어떻든 발굴을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발굴을 한다 해도 유골이 나온 것을 남의 마당에 그대로 둘 수도 없고 다른데 부지가 확보되어서 내 개인적으로 내 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있는 유골들을 내가 혼자 어찌 다 감당하면서 이장할 수도 없고 그래서 착수해볼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김희수 위원   그래서 너무 앞서간다는 전제를 달았습니다.  발굴했을 적에 사후처리관계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상당히 지금 상태로서는 납골당이 이 지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했을 적에 정확한 지금 발굴하는 유골은 정확한 숫자만 해도 확인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사후 뒷수습관계가 지금 난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유족회장 정맹근   저희들이 그래서 손을 못대고 있는 것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증언하실 분들하고 조사반에서 물어볼 분들하고 대화가 거의 하실 수 있는 것은 거의 되었습니다. 못다 한 얘기는 식사를 하면서 할 요량으로 하고 일단 정회를 하고 오후에 제 생각에는 점심 잡숩고 나서 현장을 원리지구하고 신천지구하고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싶은데......
  (\"그렇게 합시다\" 하는 위원 있음)
  일단 정회를 하겠습니다.  정회하고 나서 일단 말씀 주고 받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우리 조사반의 간사로써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질의로 고생을 하셨는데 이 기록을 근거로 해서 또 다른 추적자료를 착수하는데 같이 협력해 주시도록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자료는 산청군의회에 보내주시면 복사를 해 가지고 유족회에서 원본을 한부 가지고 계시고 우리에게도 한 부를 보내주십시오.

(11시45분 산회)


경상남도 산청군의회 의원프로필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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