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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의회 회의록

Sancheong Gun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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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산청군의회(임시회)

시천·삼장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회의록

제3호

산청군의회사무과


일 시 2000년3월7일(화)

장 소 삼장면사무소 회의실


  1. 의사일정
  2.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1. 부의된 안건
  2. 1.시천·삼장면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청원의건

(10시24분 개의)

○조사반장 조종명   격식이 없이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99년도 8월달에 시천·삼장양민학살사건, 말하자면 48·9년도지요.  6.25전쟁나기 전에 여순반란사건 관계로 양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부분이 있다, 그런 청원이 의회에 들어왔습니다.
  이 부분은 의회에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사반 구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계신 서봉석의원이 간사가 되고 공용식부의장님하고 단성에 김희수의원님하고 그리고 제가 청원을 소개한 의원이 되어서 제가 조사반장이 되고 그래서 지금까지 작업해 왔는데 서봉석간사위원을 국회에도 파견해서 조사를 해 봐도 특별한 자료가 없고 특히 국회의원 임기가 교체되는 시기가 되어서 여러 가지 어렵고 국회의원 권익현의원이 와병중이 되어서 협조받기 상당히 힘이 들고 이런 문제가 되어서 공식기록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고 지금 아는데 해준다는 얘기는 있어도 확실한 기대는 힘든 형편인데 나름대로 일단 청원을 받고 의회에서는 계속 의회에 정맹근위원장님이 많이 협조하시고 오늘 세 번째로 조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로 삼장쪽에 일어난 양민이 학살된 사건들 진상을 그 때에 계셨던 분이나 목격하신 분이나 내용을 아시거나 들으신 분들 이런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얘기듣고 오늘 단성 이선생도 오셨고 시천쪽에도 몇 분이 오셨는데 그쪽에도 아레 얘기하고 미진한 점이 있거나 참고나 보탤 말씀이 계시면 말씀을 하시도록 하시는데 기록을 하기 위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전 녹화된게 아니라서 미리 주소하고 연세가 몇 살이고 하고 어느 동네에 누구시고 연세가 몇 살이다 하는 것을 미리 말씀하시면 되고 다음에는 그리 말씀 안 하셔도 대개 이름이 아무개다 이리 말씀해도 좋겠고 그렇습니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고, 또 필요한 시기에 가면 의원님들이나 유족회 간부들측에서 물으실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시는데까지 잘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전문위원님, 하실 말씀이 계시면 서두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문위원 송귀준   전문위원 송귀준입니다. 
  오늘 이렇게 많이 시간 맞추어서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반장님께서 말씀하신, 녹음되는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으니 이 마이크를 이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양민학살사건 이게 조사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유족측에서 바라는대로 해결된다는건 아닙니다.
  일단 우리의회에 갖고 있는 생각은 있는 그대로를 한번 조사해 주고 있는 그대로를 우리의 의회의견을 붙여서 중앙부서에 처리를 건의해 보자 하는 것이 우리 의회가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또 알고 계시는대로 증언해 주시면 의회에서는 의회의 위원들의 힘을 실어서 중앙정부에 요구해 보겠다 그런 취지로 받아 주시고, 또 그렇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가지셨다가 실망하는 그런 일은 우리가, 지금 의회가 갖고 있는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증언을 있는 그대로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어느 분부터 말씀해 보실까요?  정영환씨가......  예.
○증인 정영환 반갑습니다.  저는 삼장면 평촌리 25번지 정영환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유족회 여러분, 기타 내빈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양민학살사건 그 당시에 제가 그 때 53년돈가 54년돈가 그것은 기억이 안납니다.
공용식 위원   연세는?
○증인 정영환   올해 제 나이는 68살입니다.  그 당시에 3연대라는 부대가 있었어요.  우리 마을에 주둔해 있었고 바로 내옆집에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확실히 기억이 안 납니다.  그 당시 뜽매라고 있어요.  매뜽.  마을옆에 동네가 있었는데 호구작업을 했습니다.  뭐 복구파듯이.  동네 아이고 어른이고 집합해서 그 당시 구덩이 파는데 군인들 보면 구디안에 총넣는 그 당시에, 그 때로는.  그래 가지고 조금 있으니 도라꾸에 내려다보니 차가 들어옵니다.  차가 들어오는데 보니 빽빽하게 싣고 우에 가마떼이를 양쪽으로 덮고 그 때 그래 놓고 양쪽 뒤에 하나씩 총들고 경비원인가 순사들인가 모르겠어요.  그 죄인들을 차안에 이빠이 주어 싣고, 도라꾸에 싣고 올라 가길래 우리는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우리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이 1개 분대정도 되지요.  1개 분대는 넘지, 한 20명 내지 30명 올라 가더라고요.  올라가는데 우리 예측이 저 사람들 죽이러 갔는데 조금 있으면 총소리가 날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났어요.  총소리는 안 나고 우리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금 있으니 3연대 부대들이 전체 칼을 가지고 찔러 죽였습니다.  칼로 찔러 죽였으니 소리가 안날 수밖에.  우리 마을에 보면 현재 유족들이 제가 알기로 11명 죽었습니다.  우리마을에서 11명이 죽었는데 그 내용이 2차로 죽었는데 그 당시에 서부경남에서 어느 부락에서 누가 죽었는지 몰라도요.  차는 2차이고 그 골 이름은 부엉이 가막골입니다.  부엉이 가막골인데 까막골이라고 주로 합니다.  그 뒤에 통제시켜서 우리가 시체파러도 못 갔어요.  그리고 상당히 오래 됐어, 몇 달 되는데 그 때 당시 가보니 시체가 너무 엉망이 돼 있었어요.  도무지 구별을 못할 정도입니다.  평촌마을 사람들은 자기 유족들이 가서 아는 사람은 파내어서 묘를 쓰기도 했어요.  그 당시 유족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이 썩혀 버리고 했는데 현장을 가보니 구덩이를 어북 크게 팠어요.  군인들이 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보통 죽은 사람이 한 구디에 6명 내지 7명입니다.  한 구디에 몰살했는데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 많이 썩고 말았어요.  그게 현지답사하려면 대충 터는 있습니다.  구디관계가 그리 돼 있는데 그 후로 사람들이 아들이 나무하러 가면 유골이 구불러 다니고 했는데 그 실정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 말씀드립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시기가 어느 정도 됩니까?
○증인 정영환   시기가 그 당시에 초봄인가 동짓달인가 봄인가 그리 됐어요.  11월인가 그 정도 됐어요.  낙엽이 없었거든요.
공용식 위원   음력 11월?
○증인 정영환   예, 음력 11월.  그 때 날씨가 어북 춥고 그랬으니 음력으로 동짓달 정도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일단 거기까지 말씀하시고.  예, 서봉석위원.
○간사 서봉석   정영환증인께 물어보겠습니다.
  트럭에 싣고 온 사람이 외지사람이고 잘 모른다는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증인 정영환   예.
○간사 서봉석   그러면 평촌마을 사람 11사람은 어떻게 해서 끌려 갔습니까? 
○증인 정영환   11분이 그 당시는 그 사람 잡아갈 때 제가 알기로 조금 연고된 사람이 사전에 저 모르게도 많이 잡아갔고 마지막으로 잡아간 것은 외공에 보면 그 사람이 뺄갱이 하다가 그 때 빨갱이 했는지 모르지요.  내려와서 3연대 정보과에서 데리고 오거든요.  동민을, 아이고 어른이고 집합, 안 나오면 죽인다 해서 이렇게 이래 되어지고 동민이 싹 모이면 노정기라고 있어요.  외공에 노정기라는 사람이 양민 저들을 다 담았는데 그 사람이 눈만 흘기면 잡아가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잡혀간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우리동민이 저 사람이다 하면 잡아가고 해서 학살시키고 했습니다. 
○간사 서봉석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끌려간게 한 몫에 11명 동시에 데려 갔는지 아니면 따로따로 날짜가 다르게 데려 갔습니까? 
○증인 정영환   잡혀갈 당시에 하나도 잡아가고 둘도 잡아가고 거의 날마다 오듯이 또 하나도 잡아가고 둘도 잡아가고 하나씩 둘씩 그렇게 잡아갔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일단 그런 말씀듣고 다른 분, 사람들 관계되는 걸 첨부해서 듣고 해야 내용이 있을상 싶은데 어느 분이......  예.
○증인 공영준   평촌에 사는 공영준입니다.  나이는 69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수순천반란사건 그 해 겨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사변 전입니까?  48년입니까? 
○증인 공영준 사변전입니다.  49년인상 싶습니다.  50년도에 사변이 났기 때문에.  49년도 겨울 눈이 그 날 제법 많이 와 있었는데 방금 이 동네 정씨가 말하다시피 그 당시 빨치산에 있었는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지만 노정기라는 사람이 그 당시 군인인가 경찰인가 확실히 모르지만 그 경찰인가 군인이 그 사람을 데리고 우리 동네 와서 동민 전부를 어느 한집 마당에 집합시켰습니다.  남녀노소 아이할 것 없이 다 집합시켜서 줄을, 학생들, 국민학생 아동들처럼 줄세워 놓고 그 노씨를 앞세워서 그 뒤에 군인인가 경찰이 따라 다니면서 그럼 이 사람 노씨는 암시를 군인에게 줬는데 손가락으로 줬는지 눈으로 줬는지는 확실히 몰라요.  쳐다 보고, 딱 앞만 쳐다보고 고개도 못 돌리게 하고 거기서 어긋나면 죽인다, 총살시켜 버린다 해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고 그 사람은 줄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사람을 잡아내는데 잡아내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팔치산에게 밥을 한번 해 줬거나 신발을 삼아 줬거나 하여간 조그마한, 말하자면 행동을 저 사람에게 제공한 사람을 잡아낸다 하면서 그렇게 잡아냈습니다.  점을 찍어서 만약 손짓을 했다면 그 사람은 열외로 끌어내어서 별도 세우고 저 줄에 있으면 별도 세우고 그래 가지고 그날 잡아낸 사람이 똑똑히 모르지만 10여명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11명의 숫자는 그날 잡혀간 숫자보다는 그 장소에서, 희생된 장소에서, 가막골이라는 희생된 장소에서 사후에 유족들이 나타나서 찾아낸 그 숫자가 11명 정도 된다는 것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그리 잡아가는 것도 저는 보지 못했고 열외로 잡아 내어서 세워놓는 것까지는 보았습니다.  그날 밤에 눈이 와서 보한 눈밭에서 약 2시간 정도 동민을 그냥 불러내 놓으니 맨발로, 털신도 신고 고무신도 신고 맨발로 나와서 발이 시려서 상당히 고생을 많이 고통을 느낀바가 있지요.  그래서 죽인 날짜는 모르겠고 그것은 잡혀간 날부터 얼마 정도 있다 죽인 건 모르지만 좌우간 그 2차를 싣고 왔다는 소리는 확실히 들었습니다.  들었고 누가 보고 누가 말을 낸건지는 몰라도 총에다가 깔을 꼽아서 가슴에 꽉 찌르면 칼이 안 빠져서 발로 탁 찼다는 소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본 사람도 모르겠고 말한 사람도 잘 모르겠습니다.  듣기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는지 모르지만 골짝에 가게 되었는데 가니까 엉망이 돼 있어요.  무슨 다리빼가지, 팔빼가지가 수두룩하고 유골이 굼부러 다니고 맹랑한 아이들이 볼같이 취급해서 차서 내려와서 두가 동네까지 와서 있었습니다.  그 어중간한 아이들은, 말하자면 15살 먹는 아이들은 볼인줄 알고 차고 온건 아니냐, 귀중한 것이라서 들고 오는 것도 아니고 볼같이 차고 온건 아니냐 이렇게 보아집니다.  그리고 그 유족들이 찾아간건 그 소문이 나서 타지방에서도 많이 와서 찾아봤지만 못 찾고 회향가는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분별을 못해서 누구라는 시신이 아니라 유골을 확인못해서 못찾고 회향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정도를 말씀드립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일단 그 관계를 보충해서 그 때 사건을 말씀하실 분......  손봉희씨, 그 관계 조금 보충할 것 있으면......
○증인 손봉희   삼장 평촌 손봉희입니다.  나이는 66세입니다. 
  방금 정씨가 얘기하셨다시피 부역하러 갔는데, 호를 파러 갔는데 그만 다 나가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군인들이 집으로 돌아 왔어요.  차에 실을 때 보는 것은 방금 얘기하다시피 가마로 덮어놓고 덜썩이는걸 보고 뭔가 생각안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에 군인이 둘이서 맨날 밥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 분은 이씨이고 한 분은 김용수씨라고.  김용수.  한 분은 이씨인데 이씨는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키가 크고.  그날 김용수씨가 우리집에 왔는데 얘기가 났는데 이씨는 안 오냐고 하니 사람죽이러 갔다고 얘기하더랍니다.  우리집에 와서.  그것이 2차, 그 날이 두 번째 차라고 이렇게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 분은 사람이 좋아서 우리집에 오면 얘기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만 알고 모르고 주민들은 전부 공포심에 떨어서 그 정도로 어른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는.
○조사반장 조종명   어디에서 온 찬지?
○증인 손봉희   어디에서 온 찬지는 모르겠고 단 군인차인데 그 때 볼 때 GMC찬데 뒤에 총을 매고 군인들이 두서넛이 뒤에서 같이 타고 온걸 봤고 우리 마을에 동매산이라고 부대들은 일부 그렇게 올라가는 것만 보고 우리는 집에 오고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증인 정영환   제가 부가해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그 때 3연대 중대본부가 단성에 있었습니다.  단성에 있을 때 그 때 치안대이고 순사같으면 형사도 있고 첩보대가 있을 때 단성에서 불과 두서넛 오면 아까 공면장님 말씀하시다시피 그 때 사전에 모은데서 여러 수십군데지요.  그러나 저녁때 박병무씨댁 마당에 모인지가 여러번입니다.  그 당시에 시천에 보면 양민학살사건 버스 트럭에 올 때 삼장면에서 좀 앞에 죽인 편이지요.  그 뒤에 한참 있으니 시천에 몇 차 죽였다는 얘기는 뒤에 들어봤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시천보다는 앞이다......  일단 지금 진행을 세분만 말씀하고 저쪽 평촌에서 오신 다른 두 분은 말씀을 안 하시겠다는데 그 말씀듣고 회장님 말씀하시고 위원님들 물어보시고 그렇게 합시다.
○유족회장 정맹근   정영환씨에게 질문드려 보려고 합니다.
  시천에 버스로 죽였다는 사건뒤란 얘기는 삼장에 먼저 죽이고 난 1년, 2년 뒤의 얘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증인 정영환   1년, 2년까지는 안 갔을 건데요.  확실히 기억이 없는데 몇 달 후인 것 같습니다.  얼마 안 됐어요.
○유족회장 정맹근   제가 알고 있기는 삼장은 49년11월13일로 알고 있고 시천은 외공모퉁이에서 저번에 MBC에서 방송한 건 51년 겨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증인 정영환   1년 차이밖에 안 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희수 위원   잠깐만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시천에 설통바위사건하고 삼장사건하고 연도가 어떻게 됩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제가 알기로는 같은 해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시천이 조금 앞이고 여긴 조금 뒤입니다. 
김희수 위원   다음에 방금 말씀하신 시천에 버스로 싣고 와서 죽였다는 MBC에 나온 부분은 연도는 51년도라는 얘기지요?  그러면 전쟁중입니까?
○조사반장 조종명   전면전중입니다. 
김희수 위원   예, 알겠습니다. 
공용식 위원   정영환씨에게 한 가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차량이 버스가 아니고 일반트럭이라고 했지요?
○증인 정영환   군인들 트럭입니다. 
공용식 위원   트럭이면 2대에 분산시켰다고 했는데 2대 같으면 대개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증인 정영환   70∼80명 정도 될까 생각합니다.  1대에 40명 정도 주로 앉혀 놨는데 위에서 바로 내려다 봤는데 바로 직접 보았습니다. 
공용식 위원   거기에서 70∼80명 태워 갔다면 다 죽었다는 인정이 되지요?
○증인 정영환   다 죽은 거지요.
○조사반장 조종명   어디에서 온지는 몰라도 70∼80명 정도지요?
김희수 위원   저는 단성의 군의원입니다.
  제가 특정한 어른에게 질문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마는 그 때 당시 교통편이나 대외친분간 교류관계를 보아서 극히 제한돼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이 근방 사람이어도 평소 친분이 없다보니 잘 모르게 돼 있었습니다.  제가 어르신을 잘 모르듯이.  그렇게 했을 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마는 그 사람도 결국은 이 주변사람이 아니냐, 다만 그 사람하고 어르신하고 얼굴을 몰라서 그렇지 잡혀온 그 사람이 결국은 시천, 삼장, 단성 이 근방 사람들이 아니냐?  그렇게 동의를 하십니까?
○증인 정영환   저는 그렇게 봅니다.  확실히 그렇게 봅니다.  시천, 삼장, 단성.  그리고 아닌 말로 그 사람 안면만 알고 그 사람 성, 이름도 모릅니다.
김희수 위원   예, 그렇습니다.  어르신께서 지금 단성 창촌에 있는 사람을 모르듯이 얼굴봐도 모르거든요.  어르신도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시고예?
○증인 정영환   예.
김희수 위원   예, 알겠습니다.
○간사 서봉석   손봉희증인에게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군인중에서 김용수씨라는 이름도 기억하고 계시는데 당시에 계급을 아시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증인 손봉희   계급은 그 때는 뭐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갈매기 하나, 두분다 갈매기 하나였습니다. 
김희수 위원   요즈음 말하면 하사입니까?
○간사 서봉석   그리고 공영준 전면장님에게 묻겠습니다. 
  동민 전부 모아놓은 민가에, 한 집에 모았다는데 현재 보존돼 있습니까? 
○증인 공영준   현재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누구 집입니까? 
○증인 공영준   아주머니 혼자 사는데 이름은 모르겠고 택호가 옥종댁입니다.  그 사건 당시는 박덕문씨댁이고.
공용식 위원   정영환씨에게 묻겠는데 주민이, 확실히 알고 있는 주민이 11명인데 그러면 그 후손분들이 살고 계시죠?
○증인 정영환   후손이 우리마을에 사는 한 분이 계시고, 그리고 나머지 형제분은 진주에 한 분 있고 서울에 한 분 있고 그 외에는 가족들이 다 풍비박산되어서 아무도 없습니다.  찾을데도 없습니다.  11명 가족이 2사람이 알고, 두 가족만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전체 풍비박산되었습니다. 
공용식 위원   11분이면 지금 수소문해서 어느 정도 아실 것 아닙니까?  제사는 한 날 다 모실 것 아닙니까? 
○증인 정영환   제사는 두분은 살고 있는 자녀는 알고 있고 한 날 모신다고 알고 있고 그 외에 유가족 풍비박산된 사람은 그날 한날 모시는가 안 모시는가 아무 유족들이 없고 보니까 다른 분은 주소도 모르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거지.
○간사 서봉석   트럭 두 대에 끌려와서 대검으로 죽였다는 얘기가 있고 그날 죽인 것하고 평촌에서 끌려간, 수시로 끌려간 11분, 뒤에 수습된 11분은 같은 날짜에 죽임을 당했습니까? 
○증인 정영환   11명 희생당한 사람은 한 날 잡혀가 죽은게 아니고 날짜가 몇 일 여러 날 되었지요.  또 와서 하나 잡아가고 이튿날 와서 모이라 해서 둘도 잡아가고 계속 잡아간 것이 우리마을에서 희생자 11명 났다 제가 알기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한날 잡혀간게 아니고.
○간사 서봉석  죽인 날짜는 같지요?
○증인 정영환   예, 죽인 날짜는 한날 죽였고 발견은, 잡혀갈 때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잡혀 갔어요.
○간사 서봉석   이건 좀 다른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정영환증인께, 노정기라는 3연대 정보과 근무하는 사람을, 그 사람을 제가 듣기로 외공이라고 들었는데 정확한 위치를......
○증인 정영환   그 사람을 제가 그 당시에 알기로는 첩보앞잡이가 되어서 저 놈의 새끼 사람을 많이 죽인다는 이런 말이 났어요.  나도 저 새끼는 어디에 있는 자식이고? 이리 됐다 말입니다.  그래서 말이 들리기에 외공에 있는 노정기다 그래 가지고 노정기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지요.
○간사 서봉석   여기에서 말한 외공은 시천면 외공입니까? 
○증인 정영환   외공이라면 시천 올라가는 외공에 이쪽 도로변이 내공이고 외공에 안이 외공입니다. 
○간사 서봉석   아니, 방금 어르신이 반대로 말씀하셨는데 제가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지금 어르신 말씀하신 것하고, 위치가 바뀐 것 같아요.  길쪽이 외공이고 안쪽에 절있고 연수원 있는 데가 내공입니다.  공전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르신은 안마을이라는 거죠?
○증인 정영환   안마을이죠.
○간사 서봉석   됐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노정기라는 사람을 아시는 분 없어요?
○증인 하재수 묵계사람인데......  인사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시천면 신천리 하재수입니다. 
  노정기를 아냐 했는데 대강 제가 압니다. 
  그 사람이 앞날에 6.25전에 빨치산에 붙어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자수를 해서 내려와서 산청경찰서에 있다가 붙어 있었어요.  있어 가지고 3연대 정보과에서 그 사람이 산에 많이 있었으니 데리고 다니면서 좀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간사 서봉석  연세 좀 말씀해 주세요.
○증인 하재수   74살입니다. 
○간사 서봉석   노정기씨가 사는 곳이 시천 내공입니까?  외공입니까? 
○증인 하재수   살 때는 반천리에 있고 신천리에 개미정밑에 살아서 길위에 살아 가지고 외공마을로 내려 왔어요.  거기에서 상구 밑으로, 개미정 위로는 소개되고 해서 못살고 했습니다.
공용식 위원   어떻게 죽었습니까? 
○증인 하재수   경찰로 임명받아서 좀 하다가 죽은건 어디 가서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정식 경찰이 된거네요?
○증인 하재수   나중에 경찰이 됐어요.  그 후에는 자수해 왔으니, 욕을 봤으니 경찰로 임명시켜 주었습니다.  거기까지 압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가막골 사건은 그 정도 물어보면 되겠지요?  내용을 정리하시면.
공용식 위원   혹시 지금도 근방에 노정기를 잘 아는 분이나 혹시 후손이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증인 하재수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본래 청암사람이니.  청암에 살다가 내려왔습니다.
공용식 위원   원래는 하동 청암이 원적이네요?
김희수 위원   노정기 후손이 있어도 할아버지가 못된 짓한 것 증언해줄 손자가 어디 있습니까? 
○간사 서봉석   이쪽 회장님에게 묻겠습니다. 
  삼장 가막골 유족회에 위 사실과 관계되는 주소가, 파악된거 지난 번 제출한 자료에 다 들어 있습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현재 저희들이 파악한 숫자로는 8명이 유족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아니 7명입니다. 
○간사 서봉석   11분이라고 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11명의 시체를 수습했다는데 외부는 후손을 조금만 노력하면 찾을 수 있는 거네요?
○증인 정영환   찾을 수 있는건 형제간들은 있어요.
○증인 공영준   7명의 숫자는 신청한 사람입니까? 
○유족회장 정맹근   삼장 분이 아니고 시천하고 다른데 분들이 많습니다.  이상엽씨라고 하는 분이 있고 조상갑씨, 조갑술씨, 대포리, 덕교리 그렇습니다.  김용수씨 평촌리, 유재성씨, 조일상씨, 공수상씨 그렇게 파악돼 있습니다. 
김희수 위원   그것은 사망자이고 유족으로 봤을 때 조연순 저거아버지, 공순희 저거남편, 김춘식 저거아버지, 유근조 아버지, 조진환 아버지, 환경남 시아버지.
○유족회장 정맹근 그렇습니다.  
○증인 손봉희   세상버린 사람 찾은 사람이고.  평촌사람만 11명인데 유근조아버지는 그렇고 김춘석아버지도 그렇고 김춘석 큰아버지도 죽었고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이 형제간이고 형제간도 정확하게 주소를 알 수 없는 사람들 형제간이 살고 있다는건 알고 있습니다.  주소는 몰라도 진주에 돌아가신 백부님은 돌아 가셨는데 사촌은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김춘석씨에게 연락하면 주소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주소는 몰라도 파악해요.  아는데까지.
○간사 서봉석   우선 저희들이 할 때 조사활동이 끝나면 국회에서 따로 조사를 할는지 모르지만 저희들이 국회에 청원하면 1단계 마무리되기 때문에 나중에 또 우리가 스스로 억울함을, 짐을 안겨서는, 두 번 안겨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말씀드렸으니 여기 나오신 유족들이나 관계, 참관하고 계시는 면장님을 비롯해서 민원계장님이나 이런 분들이 유족회를 적극 도와서 그렇게 명단이라도 우선 파악되고 연락할 수 있는 명단도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협조해 줄 수 있죠.
○조사반장 조종명   그 관계 아무라도 물어보실 분이나 더 보태서 말씀하실 분이나.  가막골관계.
○증인 유근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장면 평촌리 유근조입니다.  나이는 54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체찾은 간단한 계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부님이 그 당시 살아 계셨기 때문에 아침에 옷하고 양말하고 신고 간 그것을 봐서 시체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어머님께서 전해주는 말입니다.  어머니께서 그 내용을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상입니다. 
○간사 서봉석   좀 아픈데를 물어서 안 되었습니다마는 제사일이 언제인지 밝혀 주십시오.
○증인 유근조   제사날짜는 음력11월13일 저녁에 모시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증인 정영환   제가 부가해서 말씀드리면 그 때 당시 나이가 17살 정도 되었는데 그 당시에 보면 마을에 총각들이 많았는데 이명구라고 있었습니다.  이명구라고 있었는데 총각이라고는 키가 컸다는 그 사람과 나하고 둘밖에 참석못했습니다.  만날 저는 그 당시 안잡혀 가려고 물팍을 구부리서 해도 잡혀갈까 걱정을 많이 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명구는 서울가서 죽었는데 나와 연갑인데 그 사람과 안잡혀 가려고 물팍까지 구부리고 해서 키를 작게 애를 많이 써봤어요.
○조사반장 조종명   다른 분, 더 말씀하실 분?
  그러면 말하자면 그 당시에 11월13일 전후인데 눈올 때 사람모은건 몇 일 앞이다, 몇 일 앞인데 어디에 데려 있다가 죽였는지는 모르고 싣고 온 사람도 그것도 모르고.
김희수 위원   어제 우리가 먼저 몇 일전에 시천에서 들은대로 하면 시천 구장터에 창고에 사람을 잡아다 가둬놨다가 취조하고 뒤에 처형했다고 그러거든예.  그러면 여기 삼장 평촌의 사람이 그리 잡혀 갔는지, 어디 잡혀 갔는지 모른다는 건 그 당시 알길이 없습니다마는 가족들이 백방으로 알려고 노력한 건 없었는지요?
○증인 손봉희   그 당시에는 과연 오늘 우리도 잡혀갈건지 안 잡혀갈건지 어른들께서 전부다 걱정하고 숨어살듯이 살았거든요.  그런 것 알 수도 없고 가족도 어디 갔다온지 모르겠고 우리마을에서 잡혀간 사람중에 한 사람이 살아 왔습니다.  이영옥씨라고 그 당시 이장을 했습니다.  중대장에게 워낙 잘해 놓으니, 매일 닭 두 마리씩, 세 마리씩 잡고 매끼마다 찰밥을 해 주었거든요.  우리 마을에서.  군인들 보살피는 것 놔두고 중대장에게만요.  뒤에 생각하니 라디오도 없어 그렇지 저녁마다 얘기 잘 하는 사람은 중대장 앞에서 얘기도 해줬고 그렇게 그 분이 살고 왔으나 물어보다 못 했는데 뒤에 얘기가, 전쟁끝나고 나서 나온 얘기를 들으면 그분 세상 버렸는데 그 당시에 조환제라는 사람이 우리마을에서 산을 올라갔고 박영옥씨, 노정기씨 올라갔습니다.  그 당시 어른들 얘기를 들으면 사상이 확고해서 올라간 사람이 아무도 아니다, 순사들이 저녁으로 취조하고 그래서 맞기 귀찮아서 성질급한 사람이 올라가게 됐는데 그 사람들 내려와서 동네 사람들이 어짠 일이고 말이 나오니 여순반란사건이 나고 나서 그 때는 저거 세상이 되어서 낮으로는 조금 삐쳤습니다.  그 당시 얼굴본 사람을 지적한 것입니다.  노정기가.  뒤에 생각해보니 군인들에게 매를 못이겨 지적한 것 아닌가 우리가 추적이 되는기고 사실상 노정기 눈에 띄는 사람이 잡혀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 밥해준건 이런건 그 때 우리가 밥해줄 여개가 있었습니까?  군인들이 다 살고 있고 군인들에게 밥 다 해 주고 살았는데 노정기한테 낮에 나와서 얼굴에 찍한 사람은 우찌해서 잡아간 것이 사실이다 뒤에 이영옥씨 얘기들으면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정확한건 모르지만 그 당시 구장이었습니다. 그 때는.  이장이 아니고.
○조사반장 조종명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그 때 평촌에 군인들이 주둔한 부대의 소속을 아시는대로 얘기해 주시면 좋겠고 병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언제부터 주둔했는지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토벌하러 갔는지.
○증인 손봉희   그 당시 3연대라고 들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대원사 폭파사건과 어떻게 다르고......
○증인 손봉희   그것하고는 틀리고 3연대라고만.  와서 전라도 여순반란사건뒤에 3연대라고 해서 평촌에 앞에 동매산에 주둔했습니다.  병력은 1개 중대는 말만 들었지 얼마인지 모르겠고 중대장이 있었습니다.  고지에.
○조사반장 조종명   어디 가서 매일 사람 잡아간건 없었고요?
○증인 손봉희   그런건 없었고.  우리 가막골에서 2차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그 뒤에 가고 없었거든요.  언제 간지 그것도 모르겠고.
○간사 서봉석   시천면에서 증언할 때 2차회의에서는 증언자가 시천에 거주했다는 중대이름은 3연대 8중대라고 했는데 여기 오신 시천에 증언하신 외에 다른 분들, 기억이 있는지 더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면 지금 말씀해 주시고요.
○증인 공영준   중대는 들었는데 아심하이 잘 모르지만 3중대라는 기억이 있어 보이는데 그 중대장이 지씨입니다.  지씨인데 3중대 기억이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있습니다.  지씨인데 아주 우스운 사람입니다.  매일 그 때 이장이 정태일씨라고 제부친하고, 정태희씨도 앞에 이장을 조금 했는데 매일 닭 한 마리, 이 분은 찰밥을 어떻게 좋아하는지 찰밥 아니면 안돼요.  별도로 찰밥을 해서 매일 이장이 받들어 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두들겨 맞는다고 그 분은 이장하다가 두들겨 맞느라 세월다 보냈어요.  그러한 기억이 납니다.
공용식 위원   손봉희씨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3연대 중대본부가 단성에 있었다면서요?
○증인 정영환   중대본분가 대대본분가 단성에 있었습니다.
공용식 위원   본부가예?  그러면 단성에 지역으로 어디쯤 있었는지 모르겠습니까?
○증인 정영환   저는 본부설치해 놓은데 안 가봤고 제가 듣기로 이 사람 끌려가기로는 시천으로 갔냐, 단성으로 갔냐 하니 단성으로 간다 그래요.  시천도 그 때 학교에 군인들이 많이 있었고 단성이 본부입니다.  본부로 간다 이기라요.  지역은 어디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 지역은 단성이다.
○조사반장 조종명   그러면 우리가 평촌을 이쪽으로 놓고 하재수씨에게 신천관계 증언하실게 있다는데 얘기들어보고 하재수씨가 관련지어서 하실 얘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증인 하재수   방금 제가 인사드렸는데 시천면 신천리에 살았습니다.  하재수입니다.  나이는 74살입니다.  그 당시에 3연대가......  이야기가 조금 깁니다.  들어와서 3일만에 3연대 설통바위라는 데가 있었습니다.  우리마을입니다.  그 마을에서 새벽 날이 다 새어갈 무렵 군인 3차가 올라와서 6월 날짜는 음력6월스무이튿날인가 되었습니다.  총소리가, 자다 늦게 일어나다보니 나고 논에 양민이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어나다 못하고 논에 쳐박혀 있고 그래 가지고 30분 싸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나가보다 못하고 밥때가 넘어 가니 총소리가 끊어지고 좀 있다보니 군인이 큰 부대가 한정없이 올라오는 거라요.  3차가 올라오는데 나도 연구해서 앞장서서 인사하고 잘왔다 가보자 해서 앞서서 갔습니다.  나가보니 차는 3차가 타져서 군인이 타죽고 3차가 타고 그렇게 됐는데 그러니 참 보다 못하게 돼 있는거라요.  거기에서 군인들을, 죽은 사람들을 보니 차밑에 군인은 30명 죽어 있는데 32명 죽은 사람이.  내손으로 그 차에 3차 실어 주었습니다.  32명.  죽은 사람이 32명, 그랬는데 다 싣고 나니 12시가 넘고 1시 넘었는데 그래 가지고 또 인자 마을주민은 내깽변으로 다 불러서 동네 한 사람없이 그 근방 신천 보안, 삼당까지 했으니 삼당은 신천국민학교에 전주민을 소집시켰고 그래 가지고 그걸 마치고 군인을 다 실어주고 나서 죽은 사람 실어주고 나서 앞에 곡점 학교, 신천국민학교 올라 갔는데 그 때 차람띰을 가지고 올라가자 해서 들고 올라갔는데 함께 군인들 앞장서 올라가서 보니 위에 동당리 마을사람을 신천국민학교에 다 줄줄하게 놓고 그 때 내가 갈 때 줄줄하게 줄세워서 M1을 가지고 3십몇명을 양민을 쐈습니다.  확실히 내눈으로 봤는데.  그리고 나서 쏘는 것만 보고 장소옮겨서 실탄가지고 따라서 갔는데 그래 보니까 나중에 쏘고 나서는 안 죽은 사람이 있겠지요.  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물건네 너른 들이 있는데 구들파서 묻으라고 했는데 옳게 파다 못하고 들어다가 집어넣고 다 했는데 또 한 사람이, 장영세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다쳐도 죽은척하고 있다가 했는데 발을 맞았는데 위에 갈 때 나보고 살짝 위에 올려 놓아라 해서 위에다 놓았어요.  군인들이 나와서 지는 도망을 갔지요.  여기 있으면 죽을 것이고 가버리고 뒤에 남은 사람 시체는 과정을 다 아니 다 찾아갔어요.  한 사람도 없이 다 찾아가고.  그렇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했는데 참 너무 억울한 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천국민학교 양민학살이라는 것을 내눈으로 똑똑히 보고 참 개떡같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간사 서봉석   설통바위에서 군인들이 당하고 나서 보복으로 마을인근에 다른 어떤 피해들, 예를 들어 가축이나 민가에 방화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서도 할 수 있으면......
○증인 하재수   우리 마을에서도 집에 불을 다 지르고 또 손상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손상대의 마누라를 방에 넣어놓고 불을 질렀어오.  못 나오게.  확실히 내가 보았습니다.  우리마을에 또 사는 분, 심부름해야 되니 잘못한 사람은 무조건 총을 다 쐈습니다.  죽고 그러니 손상대 동생이 두사람 죽고 나와 있으니 어리하게 심부름을 안하고 하니 쏘고 일하다가도 쏘고 나도 쌀라 샀는데 애원해서 빌고 하니 죽을건데 애원하고 해서 살아가지고 갈 때는 어두워졌는데 불을 지르고 집태우고 사람 쏴죽이고 했는데 이런 난리니 뒤에 대한민국이 잘 되면 집도 지어줄 것이고 회복해 준다 그리 잘 사십시오하고 떠났는데 떠나고 난뒤에 그 이튿날 못 살고 덕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간사 서봉석   당시에 가옥을, 마을을 전소를 했던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당시에 마을에 호수는 몇 호 정도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증인 하재수   마을에 살기는 30호 살았는데 윗방이 있고 아랫방이 있습니다.  설통바위 곡점 밑에 그 집이 우리가 한 밑에 사는데 20호 정도 됐는데 전소난데만, 그 사이만.  건너로 이 건너로 저 건너로 다 지르고 밑으로 다른 데는 안 지르고 나는 이 밑에 회관에 정기나무밑에 살아 놓으니 그 집 산사람은 그렇게 안 하고 전소난 자리에 사는 사람이 많이 당하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시천면은 그렇게 했습니까?  3부5계까지?
○증인 하재수   그 때는 뒤에 질렀어요.  신천만 지르고 방에도 건너편에 지금 집많이 지어놓은 사람만 집을 다 지르고 했습니다.  이쪽저쪽 맞은 편......
○조사반장 조종명   어르신, 날짜별로 3월3일 증언들은건 7월18일 아군 3연대 병력이 3트럭 죽었다 해서 7월22일 일반 양민을 죽였다 이렇게 얘기됐는데 그런 점하고 시차별로, 날차별로......
○증인 하재수   날짜를 맞춰보면 7월이나 그 때 되니 얼추 맞아질 것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군인들은 6월 언제이고 민간인은......
○증인 하재수   민간인은 한 날, 같은날 죽고 보복으로 그만 올라가서. 
김희수 위원   보복으로 12시부터 몰아놓고.
○이재천 저는   시천 이재천인데요.  어머님에게 들은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나이는 52살입니다. 
  그 당시가 양력은 모르고 음력으로 23날이라고 아는데 스무이튿날 저녁이 할아버지고 삼촌하고 기일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7월18일이 되더라고요.  그 때 우리집에서 할아버지하고 삼촌하고 아버지하고 식구들이 점심먹으려니 군인들이 와서 빨리 곡점 학교를 모이라 해서 점심도 못 잡숫고 잡숫다가 내려가서 그렇게 총살을 당하셨는데 삼촌이 총에 맞아 죽으니 할아버지가 \"죄없는 내자석 죽이는데 나도 죽여달라\" 해서 일어서니 군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이게 전부다 너 자석까?\" 하면서 \"영감 죽고 싶으면 나서라\" 해서 총을 쏴 죽였다는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증인 하재수   나도 확실히 들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3부5계 지나고 나서......
○간사 서봉석   하재수증인께 묻겠습니다.
  하재수증인은 신천초등학교 학살현장에 있었습니까?  
○증인 하재수   신천국민학교 학살은 그 때 밑에 정리하고 그 장소로 올라가니 오후입니다.  오후에 가니 사람 줄줄하게 세워놓고 학살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M1으로 쐈어요.  권총으로 안 싸고 M1으로 쏴니까 몇 발 안 쏘아서 사람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 때 M1이 안 쌥니까?  모아놓고 줄을 세워놓고 나래비를 세웠습니다.  앞에서 M1을 쏘니 그냥 사람 몇 씩 죽었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어떤 식으로 사람을 잡아 왔는지?
○증인 하재수   제가 올라가니 줄을 서 있었습니다.  밑에 일마치고 칼하나 해서 짐어지고 올라가니 줄서 있는게 제가 올라간 당시에 쏘는데 방금 이재천씨 말처럼 삼촌을 쐈는데 내자석을 죽이나 야 이놈아, 하니 나도 쏴라 하니 나오라 해서 죽었습니다.  그 어른 그렇게 안 했으면 안 하는데 그 자리에서 하고 그렇게 됐습니다.  줄서 있는 앞의 내용은 몰랐는데 학살한 것만 보았습니다. 
○간사 서봉석   확인사살은 없었습니까?  사람이 한 방맞고 안 죽을 것 같은데 다시 재조정하거나......
○증인 하재수   안 죽은 사람은 또 싸고 또 싸고 했습니다.  세워놓은 사람은 안 세운 사람은 놔두고 다 쐈습니다.  줄을 줄줄하게 세워놓고, 일렬로 세워놓고 안 쏸 사람, 남은 사람은 가아로 남아 있고.
김희수 위원   그 때 총맞은 사람이 30명 정도 되고......
○증인 하재수   3십몇명 넘었는데 참 억울한 학살입니다.
김희수 위원   이 쪽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 
○증인 하재수 많지요.  근방 부락 여자남자 할 것 없이 뱅 둘러 있으니......
김희수 위원   거기에서도 찍어준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증인 하재수   나온 사람은 몰라도 여하튼 뒤에 물어보니 공비가 내려온걸 봤나 안 봤나 하니 안 봐도 하고 본 사람을 봤다하니 봤으니 불러 냈겠지요.  안본 사람은 안본 사람에게 저 사람은 봤는데 니는 안봤나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양민을 학살을 한 것입니다.  참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 때 성이 나니 걸리면 다 죽은 것입니다.  조금 젊은 사람은 저쪽 먼저 불러내서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을 뒤에 불러내서 하고 그것을 다 못 보고 갔습니다.  또 저거 따라가야 하니 어둡도록 보내서 마쳐주고 오니 밤이 어두우니 잡아갈까 겁이 나서 그날 저녁 집에서 못 자고 산에 올라가서 바구밑에 자고 와서 아침에 날새고 나서 덕산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김희수 위원   제가 삼장어른들한테 한 가지 더 여쭤 보겠습니다. 
  삼장에는 가막골사건말고는 특별하게 집단적으로 학살은 없습니까? 
○증인 정영환 없지요.  그 당시에 피난가서 죽은 사람이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많지요.  그 당시에 순수한 농민으로서 살기 위해서 너무나 6.25사변 나고 나서도 애맨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왜 죽었냐 하면 낮으로는 대한민국, 밤으로는 뺄갱이듯이 밤에 피난가서도 많이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 말도 못 합니다.  우리마을에 통계내보니 아이고 어른이고 80명 정도 돼요.  애맨 죽은 사람이 80명 정도입니다.  가막골에서 그 당시 그렇게 죽었고 산으로, 살거라고 피난간 사람 죽은 사람 많지요.  
○조사반장 조종명   사건내용이 아마도 나중에 녹음기록을 정리해봐야 되는데 3연대 8중대 행위한 것 같고 삼장 이선생님 말씀하신 것 음력 6월30일 날짜가 거의 맞아지고 그 부대가 왔다갔다 한건 아닌가 싶고, 일단 이것을 유족 확인작업하기 전에 속기록이 정리되면 그것으로 서간사님도 힘들지만 줄거리요약을 해서 14일 회의할 때 요약줄거리를 읽어본다든지 유족에게 고칠건 고치고 사건경위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하고 유족은 유족대로 조사해서 첨가하고 속기록을 붙이려면 붙이고 해서 그렇게 다시 건의올려서 처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진행해야 될 것입니다.  
  미진한 부분 더 말씀하실 거나 물어보실 거나 있습니까?  예, 김의원.
김희수 위원   저는 아무래도 가막골에 거기에서 처형된 사람도 근방 사람들이 구장터에 몇일 잡혀 있다가 취조받고 트럭에 태워져서 처형이 된 것으로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했을 것 같으면 8중대, 지중위밑에 있는 8중대가 저쪽에는 설통바위사건 나고 나서는 무차별 학살을 하고 나서 삼장으로 그 사람들을 잡아다가 놨던 사람들을 삼장에도 처형하고 시천 원리에서도 처형하고 그렇게 봐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자기들 처형장소는 임의대로, 자기들 기분나는대로 처형한 것이고.
○조사반장 조종명   지금까지 증언된 것으로 보면 제생각은 그렇습니다.  정리해 봐야 알겠지만 이제까지 정리된걸 보면 3연대 본부는 아마 덕산, 지금 덕산중학교 자리, 원촌국민학교 자리에 안 있을거나 그렇고 3연대에 정보부는 구장터 산업창고 있는데 정보부에서 삼장이나 시천이든지 단성이든지 주민 잡아서 분류해서 원촌이나 삼장이나 시천쪽에 가서 사람 죽인 것 아닌가 대강 생각이 되는데 그러면 사람이 군인부대 간부들, 장교들 거론된건 정보부장 김시곤대위가 얘기나왔고 연대 정보부장 대대장은 영관급인데 조재인이 아닌가 이 부분 아시는 분, 말씀해 주시고 부관은 정해운소위더라 이런 말이 나왔고 8중대 중대장 이름은 3일날 거명됐고 지중희중위이다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주로 3연대는 거기 있는데 연대본부는 있는데 주로 활동하고 다닌건 8중대가 아닌가, 2중대도 나왔는데 어떤 중대가 맞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싶고 유족회장님을 그런 부분을 정리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녹음된 것외에도 보고자료를 내어서 자료정리할 때 참고되도록 해 주시고 다른 분도 참고되는 것 있으면 오늘 아시는대로 말씀하시고 오늘 생각이 안나고 뒤에 듣거나 들은게 있으면 유족회장이나 저에게 제출해 주시면 참고해서 삽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희수 위원   제가 아는 군대상식으로는 1개 연대밑에 4개 대대가 있고 1개 대대밑에 4개 중대가 있고 또 1개 중대밑에 4대 소대가 있는 것으로 군대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3연대 밑에 나머지 3개 대대가 각 또 시천, 삼장, 단성을 제외한 다른데 파견이 돼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면 3연대 8중대, 3연대 무슨 대대도 8중대가 시천, 삼장, 단성까지 전부 카바했다고 봐지거든요.  1대 중대병력으로 물론 총칼든 군인하고 민간인하고야 댈 수가 없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하기는 조금 인력적으로 모자라지 않느냐 그러면 말고 최소한 1대 중대 정도는 최소한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증인 하재수   중대가 많아요.  연대장밑에 대대가 3개이고 대대장밑에는 중대가 3개 있습니다.  그 밑에 소개가 3대 있습니다.  나오는데 그 때 제가 알기로 부대가 원리 중학교에 주둔했습니다.  삼장도 1개중대 하나 배치하고 시천도 외공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거기 1개중대 배치하고 단성도 1대중대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본부는 덕산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반란군이 덕산에 넘어온 시기는 언제입니까?  대원사는......
○증인 정영환   여순반란사건때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48년입니까? 
○증인 정영환   47년일 건데요?
○증인 하재수 48년입니다.  그 사람들 따라서 지리산에 붙어서 양민을 못 살게 하고 타죽고 절단내었습니다. 
김희수 위원   여순반란사건때문에 시천, 삼장사건이 있었습니다.  전라도에도 있었고......
○증인 하재수   시천 삼장뿐만 아니라 전라도, 3개도 18개 군은 서남전투경찰이 생겨서 작전을 군인과 똑같이 해서 있으면서 참 양민학살사건 14연대 그 사람이 와서 조지고 전라도 3연대 와서 조지고 양민을 전라도사람이 쏴서 죽이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죽였지 다름 사람들은 하나도 안 죽였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제가 압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혹시 정팔구선생님,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안 계시면......
○증인 이원상   단성 금만에 사는 이원상입니다.  제 나이는 올해 64살입니다. 
  제가 그 당시 먼저도 3월3일에도 시천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제가 그 때 학교방학을 했습니다.  국민학교 방학을 했는데 한 12시나 되니까 산으로 들로......
○조사반장 조종명   여름방학입니까, 겨울방학입니까?
○증인 이원상 여름방학입니다.  들로 새카맣게 군인인가 경찰인지 모르지만 내려 오더니 무조건 집에 들어서 구두발로 차면서 학교좌담회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어린애도 전부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안 나갈수가 있습니까?  나가보니 논매는 사람, 무지옷 입고 그대로, 밭매는 사람 전부다 끌어모아 놓고 하는 말이 그 사람이 3연대 김대위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못듣고 3연대 김대위가 하는 말이 \"여수순천반란사건이 말이여\" 하면서 어찌나 말이 한이 없었지요.  거기에서 전쟁을 하다가 사람 600명 죽였다고 하면서 남로당, 민예총, 세토 3개를 들먹이면서 거기 가입한 사람 솔직히 나오라고 그렇게 야단치는 것이라고요.  알 수가 있습니까?  남로당이 뭐며, 민예총이 뭐며, 세토가 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우리는 총을 67포라고 했습니다.  67포를 팡팡 싸면서 전부 눈감으라고 해놓고 우리는 눈을 슬그머니 떠보니 어떤 놈인지 몰라도 키도 커요.  용시로 둘러씌워서 사람을 눈짓을 하면서 전부가 거기 있는 사람은 다 노끈가지고 묶더니 열로 죽 세워서 시천으로 가는지 하여튼 덕산으로 갔는데 그 때는 시계도 없었고 한 서너시 되었습니다.  올라가는 걸 그 때 도가집에 까매이 아지매가 유명하게 욕도 잘 하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이 시발놈들아, 왜 죄없는 사람 데리고 가나\", \"뭐 이따구가 있어 이년, 쏴 죽일라\"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뒤로 6월 그믐날이라는 건 확실히 알거든요.  저의 아버지는 7월초이튿날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 때 우리동민 11사람이 죽었습니다.  물론 살아온 사람이 없잖아 있고 살아오신 분들은 거기에서 3연대에게 보름동안 한 달이나 두달 있다가 나온 사람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맞았는지 나와서는 치료를 약을 지어주고 이렇게 이렇게 하다 골병들어서 죽은 사람이 없잖아 있고 동민 30여명 전부다 잡아갔거든요.  30명 정도 그런 무자비한 짓을 당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6월30일이 그믐날하고 거의 같다 했지요?
○이재천 예?  음력으로 6월23일.
○증인 이원상   우리는 6월 그믐날이고.  제가 듣기로는 3연대 본부는 단성에 주둔했다는 말은 저희는 못 듣고 단, 나오면 덕산에서 나오거든요.  나왔고 사람이 그 뒤에 선들도 가고 길리도 가고 당산에도 가고 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잡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구장터입니다.  구장터 거기에서, 실골이라는 곳 거기에서도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마을에는 시체는 한 사람도 찾아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시체찾을 정신도 없고 밤낮 우리마을에는 울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고 그랬습니다. 
○조사반장 조종명   더 하실 말씀 계십니까?  안 계시면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일정을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점심 잡숫고 평촌에 가막골에 가 보시고 오늘 회의는 마치고 평촌마을하고 말하자하면 학살현장하고 마을에 모인데를 둘러보고 일정을 마칩니다.
  미진한 건 아까 말씀드린대로 되는대로 그 안에 써줘도 좋고 전화도 좋고 보태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1시40분 산회)


경상남도 산청군의회 의원프로필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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