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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병택
제목 神醫 劉以泰 先生의 약력
내용 居昌 劉氏 大宗會 에서 알립니다.

神醫 劉以泰 선생의 약력

거창유씨(居昌劉氏)를 본관으로 숙종 시대의 명의(名醫)유이태(劉以泰)약력

유이태(劉以泰)약력

조선후기 숙종때 어의를 지낸 의원.
홍역전문치로서인 (마진편)을 토대로 예방 .치료에대한 의학 전문서인 (마진경험방)을 펴냈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실험단방.인서문견록)
본관은 거창이며 호는 신연당 혹은 원학산인이라고 했으며 별칭자는 백원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서마리에서 1652년 (효종3년)에 출생 하였다.
숙종때 어의를 지냈으며 안산군수로 임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전념하였으며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하여 중국의 명의인 편작에 비유 하기도 했다.
그의묘소는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번지에 위치한다.

역사(歷史)는 영웅(英雄)과 權力을 가지고 있는 자(者) 그리고 가진 자(者)의 위주로 기술(記述)되어 왔었다. 영웅도 아니며, 힘이 없는 자(者)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자(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절대권력(絶對權力)이 존재하였던 시대(時代)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자리인 영의정(領議政)에 있었던 분들도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수 십년이 흐르면 세인(世人)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만다.

신연당(新淵堂) 유이태(劉以泰) 선생께서는 권력(權力), 힘과 가진 것도 없었다. 그 분이 가진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孝), 나라를 위하는 충(忠), 형제를 위하는 우애(友愛), 神技에 가까운 의술(醫術)과 귀천(貴賤), 노소(老少), 親疏(친소), 남녀(男女) 그리고 민관(民官)을 구분하지 않은 고귀한 인품(人品) 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안위 보다는 가족 위하였고, 가족 안위 보다는 이웃을 위하였으며, 오직 헐벗고, 병마(病魔)에 고생하는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신 新淵堂께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만일 新淵堂께서 부귀(富貴)와 권력(權力)을 탐하였으면 과연 지금까지 그분의 고귀(高貴)한 人品이 구전(口傳)으로 수백년을 전해져 왔을까 반문해 본다.

그 답변은 1934년 목판본 《마진편(痲疹篇)》을 펴낸 진주 회춘헌 약방 박주헌 선생이 쓴 《마진편(痲疹篇)》 발간 서문 “천민이나 아이들까지도 아직도 그의 명성을 말하고 있으니, 당시 선생의 넓은 덕망(德望)과 의술(醫術)을 상상할 수 있다.”

또 다른 저서 실험단방(實驗單方) 서문 '내가 평상시(평일)에 잡병에 대해서 경험한 것과 얻어들은 단방을 수시로 기록한 책으로 갖추어서 뒷날의 구명 치료의 방도로 하니 비록 의가전서와 같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날로 쓰이는 일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될 가 한다.
(余觀人之一生 無病者盖鮮矣 然使病者 能知其調治之方 則必不至損傷之患 可不愼歟 余利平日 雜病之經驗 所得聞之單方 隨錄於一冊 以備來後救療之方 雖非醫家全書之祥 亦陽暮看下澣 麟西 劉爾泰)' 에 잘 나타나 있다.

신연당『新淵堂』은 조선 정조(正祖) 때의 명의(名醫)가 아니고 숙종 시대의 명의(名醫)로서 숙종 어의(御醫)를 지낸 것이 의약동참선생안《(議藥同參廳先生案 : 조선시대 의약동참 어의(御醫) 명부, 소장처 : 요령성 도서관)》에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계사년) 12 월 16일에 『新淵堂』이 “전주에서 칭병하고 내의원에 도착하지 아니했다.”고 하여 벌을 주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이 내용만을 읽고 한양에 가지 않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新淵堂』은 한양에 빨리 도착하기 위하여 급히 가다가 다처서 숙종이 요구하는 기일에 도착하지 못했기에 때문에 벌을 주라는 내용이 숙종실록에 기록된 것 이다. 『新淵堂』은 한양에 도착하여 도수환(導水丸)이란 처방으로 숙종의 병을 고친 내용이 『新淵堂』 문집에 참봉 정중원이 쓴 글에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친구 분들이 쓴 글(天眼(천안)을 뵈웠다)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숙종실록에도 숙종이 도수환이란 처방으로 병이 완쾌되었다는 기록 《숙종실록 055 40/05/03(계묘) / 임금의 환후가 심해 도수환을 올릴 것을 명하다》임금의 환후가 더하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이 홀로 도수환(導水丸)을 진복(進服)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여 밖에서 제조(提調)와 힘써 다투고, 임금 앞에 나와서도 또 다투었다. 여러 어의(御醫)들이 비로소 모두 시험삼아 복용해도 무방(無妨)하다고 하니, 오늘부터 도수환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나와 있다.

『新淵堂』에 대해서 대부분 산부인과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新淵堂』의 다른 저서 《실험단방과》, 《인서문견록》에 나타나 있드시 산부인과 뿐만 아니라 홍역, 침, 내과, 소아병, 종기, 독약, 나병 등,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다. 침술 도구는 1940년대 까지 『新淵堂』 종손에게 전하여 왔었고, 침술의 대가로 알려져 왔었다.

의술 공부는 스스로 독학을 하여 터득한 의술임을 『新淵堂』의 저서 마진편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新淵堂』과 절친한 친구인 정중원(鄭重元 參奉)이 쓴 글 어릴 적에 미진이 있었던 연유로 팔을 꺾어 의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寶書를 한부 품에 안고 낮에는 읽고 밤에는 거듭 생각하여 삼년 만에 의술이 통하여 軒?( 헌원씨와 기백--> 의학, 의술)를 엿볼 수 있었다.

경험하여 마음으로 깨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전수는 외부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여항에서 시험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방에서 알게 되어 倉公 (한나라의 명의. 성은 淳于 , 이름은 . 太倉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창공이라 함)의 문 앞에 운집하는 병자가 어찌 그렇게 많을 수 있는가. 들어서면 집안에 넘쳐나고 나서면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다. 적은 글이 전폭에 쌓이고 차례대로 늘어선 줄은 늘어놓기에도 번거롭다. 말소리가 이리저리 오가고 간절하고 급하게 부탁과 호소를 다툰다. 어지럽기가 사무가 바쁜 읍의 정청을 방불하며 가득찬 뜰에는 보내는 말이 많도다.

눈을 굴리며 빈번한 명령을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며 조그마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명쾌하기가 포정(유명한 요리사. 소고기를 바르데 지극히 교묘하였다) 이 고기를 벨 때 긍경( 뼈에 붙은 살과 뼈와 살이 이어진 부분)에도 칼이 머뭇거리지 않은 것과 같았다. 평소 소원했던 이도 물리치지 않았으니 어찌 비천한 자라고 그냥 두었겠는가. 사람마다 물어오면 응하고 하나하나 증세에 따라 처방하였다.

에 나타나 있다. 또한 집안에 구전되는 이야기 또한 혼자서 의술을 배웠다고 하였다.
『新淵堂』 家門에서는 醫術을 家業이나, 공부한 사람이 없다고 전해져 왔었다.
따라서 『新淵堂』 當代에서 공부하여 醫術 活動을 편 것이다.

ꋮ 性 名 :유이태(劉以泰)

신연당께서는 그 이름을 가문에서는 劉以泰, 의서에는 劉爾泰로 사용하였다.
∙ 劉以泰 : 가문, 지인, 향리사람들이 칭하던 이름으로 족보, 문집, 孝行狀, 呈營狀, 조선왕조실록, 의약동참선생안 등에 실려 있다.
    ∙ 劉爾泰 : 《마진편:》, 《실험단방》, 《인서문견록》 등 醫書에 사용되었다.

ꋮ 號 : 사용하셨던 號는 3개가 알려져 있다.

신연당(新淵堂) : 산청군 생초면 신연의 신연 지명에서 따 온 것이 新淵堂이다.
원학산인(猿鶴山人: 猿鶴洞은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지명이다.): 猿鶴山人은 猿鶴洞에서 따온 호가 이다.
      ∙ 新淵堂 : 스스로 지은 호로서 家門, 인척, 친구, 知人과 향리의 사람들이 부를 때 사용되었다.
      ∙ 猿鶴山人 : 醫書인 저서 《마진편》에 사용하였다.
∙ 麟西 : 醫書인 저서 《실험단방》, 《인서문견록》에 사용하였다.

ꋮ 字 : 백원(伯源)

ꋮ 本貫 : 거창유씨(居昌劉氏)

ꋮ 生 沒 年: 1652년(孝宗 3년 壬辰) ~ 1715년(肅宗 41년 乙未) 二月 二十七日
ꋮ 出 生 地 : 慶南 居昌郡 渭川面 司馬里
ꋮ 거주(활동)지 :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ꋮ 관    직 : ∙ 숙종 어의(御醫) ∙ 경기도 안산 군수
ꋮ 품   계 :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ꋮ 묘   소 : 경남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 번지 (명주동)
ꋮ 유 적 지 : 신연당과 관련된 유적지는 생가, 활동지, 서실, 약수터, 낚시터, 침바위 그러나, 서실은 구전과 문헌에만 나타나 있다.
   1) 서실 : 가문과 생초면민 그리고 인근의 주민들은 신연당이 지은 서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못했고, 그 위치 또한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신연당 문집을 본바 문장은 찾을 수 있었다.

『오공께서 만년에 棲息之計를 세우시고 서실을 創營하신 것이 이미 일년이 넘었는데 올 봄에 두창을 피하는 장소로 삼으셨다. 한 마을이 일제히 일어나 얼마 안되어 완성되니 오공께서는 서실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셔서 여러 차례 내왕하셨다.』 글 朴季亮 박계량(字 : 汝明, 1686 ~ 1727) 반남박씨 족보 1981년 9권 25P

   2) 약수터 : 신연당이 의술활동을 편 생초면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산청, 함양, 진주 등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2개의 약수터(오부면 오전리 황새봉 목 부위 아래에 있는 약수터와 금서면 왕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가 있다.
    - 찬샘이( 西出東流水 서쪽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물) (위치:열두모레이, :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산1번지)
     - 장군수 (고증 : 姜戊成, 1918 ~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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