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덕산사에 얽힌 설화

산청에 얽힌 전설ㆍ설화이야기

덕산사에 얽힌 설화

덕산사는 삼장면 내원리에 위치하고 있다. 덕산사의 유래는 약 1300여년 전인 신라 태종 무열왕시대 무염국사(無染國士)가 창건 하였다고 전해온다. 그 당시의 덕산사는 스님과 신도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하였으니 현재 절 주변에는 그 당시의 암자로 추측되는 절터가 12개소나 발견된 점으로 보아 짐작될 수 있는 일이다.

지리풍수설에 이 절터는 큰 명당이라고 일러온다. 이곳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약 12km 내려오면 문득 산줄기는 멈추고 좌우에서 흘러든 계곡이 합치면서 천작으로 명승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치가 아름다운 명당에 큰 절이 위치해 있는지라 각 지방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줄을 이어 혼잡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절 안팎에서 붐비는 인파는 자연히 떠들썩하고 소란스럽게 되어 절에서는 이를 감당하기도 어렵거니와 수도하는 스님에게도 큰 지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서 주지스님은 어떻게 하면 소란을 막을 수 있는가? 또한 외부의 사람을 적게 오도록 할 수 있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낯선 늙은 스님이 이 절에 찾아와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주지스님이 우연히 이 문제를 들어 걱정을 하였더니 그 노승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를 그런 일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다시 캐고 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을까 하고 재차 다그쳐 물으니 그때 노승은 입을 열고 앞에 보이는 남쪽의 산봉우리를 가르키며 그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 될 것이라 하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이때에 주지스님은 그 말을 이상히 여기고 생각 끝에 노승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대중 스님들이 총동원 되어 개울에는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에 까지는 길을 내고 난 다음 모두 모여서 쉬고 있는 판에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징조냐고 수군거렸다. 그 후 풍수설에서 해명하기를 앞에 있는 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는 쥐 혈인데 여기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 혈에 찾아가서 쥐를 잡아 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그렇게 많이 왕래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줄어들어 스님들은 조용한 가운데 수도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 안되어 뜻밖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일어나 절은 전부 불타버리고 말았다. 덕산사가 불탄 연대는 500여년 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때에 이 절에는 “삼장사”라고 하여 세분의 장사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절이 불타고 있을 때에 세 사람의 장사스님이 이곳 개울에서 커다란 나무통으로 물을 길어 쏟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은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는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은 불을 잡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화재를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천재라 하였고 먼저 말한 풍수설에 따라 풀이하여 왔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절에는 개울 가까이에 장군수라고 하는 약수가 있었다 한다. 이 약수를 마시고 많은 스님 중에서 세 사람이 장사가 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이한 힘이 있었는데, 절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대중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 큰 바위를 들어다가 덮어두고 떠났다고 하는데 이 바위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한 두부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큰 맷돌과 여름이면 김칫독을 물에 채워 두는 곳이라고 하는 웅덩이가 개울 옆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동안 오랜 세월이 흘러 이 절터는 개인이 소유하는 농지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홍원경 스님이 지리산 토굴 왕래하면서 논 가운데 우뚝 솟은 탑과 축대만 남아있는 폐허를 바라보고 뜻한바 있어 천년전의 옛 꿈을 재현코자 노력하고 있다. 1959년 3월 드디어 본당을 비롯하여 부속 건물을 세우고 계속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신라 시대의 3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