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개요

추무공원소개

사건개요

발생일시

1951. 2. 7. 06:00 - 18:00

장소

  • 2개군 3개면 4개마을
  •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 방곡마을
  •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내용

  •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207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중
    양민을 통비 분자로 간주 집단학살한 사건(제 4대국회 제35회 임시회 - 산청·함양·거창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2인 : 1,818명 인명 피해)
  • 사망자 및 유족 등록 사항(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 심의 위원회 결정)
  • 사망자 : 386명(산청 251명, 함양 135명) 유족회 주장 : 705명
  • 유족 등록 : 732명(산청 551명, 함양 181명)

산청·함양사건의 역사적 진실과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

서문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의 근거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본 특별법이 제정 공포(1996.1.5) 된지가 7년이 된 현 시점에서 이 자리에서 산청과 함양의 유족 대표로 학술대회의 토론자로 참석하여 공식 등록된 사망자 386명과 (거창 : 548명, 산청ㆍ함양 : 386명) 유족 732명의(거창 : 785명, 산청ㆍ함양 유족 : 732명) 심정을 대신하여 토론자로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어느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실로 착잡한 심정을 솔직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사건의 시작

11사단과 9연대 3대대의 작전 행로

1950.6.25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9.25 소위 전쟁 이전부터 준동하고 있던 빨치산 소탕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이 창설되고, 사단장에는 최덕신 중장이 임명되고, 9연대장에 오익경 대령, 3대대장에 한동석 소령 등이고, 사단 사령부 및 9연대, 13연대, 20연대 등은 미 9군단장의 작전 지휘를 받으라고 되어 있었다.

국방부, 국전쟁사, 제4권 전사편찬위원회 편, 1971참조, 김동춘교수 논문집, 참조) 특히 11사단 9연대가 적개심이 촉발된 계기는 1950년 11월 29일 남원의 사단본부의 참모회의에 참석하려고 지리산의 고동재를 넘던 미 군사 고문단의 리 대령, 장교 2명, 사병 28명이 적에게 공격당하여 사망하였으며, 이런 일을 당한 11사단 9연대는 공비들에 대한 더욱 강한 적개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후 남원에서의 지휘관 회의에서 어떤 사항이 논의, 결정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더욱 강경한 초토화 작전이 수립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내국방부 한국전쟁사 59 및 제4권, 전사 편찬 위원회 편, 1971. 참조 리영희 역정 나의 청년시대 참조, 김동춘 성공회 신학대학 교수ㆍ거창 사건 학술대회(2000.10.21 논문 참조.)

산청ㆍ함양 지역 대 토벌 작전과 양민 대학살

1951.2.5 오익경과(9연대장) 한동석(3대대장) 은 경찰을 포함한 청년 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총 700명을 이끌고 신원면으로 진격하였던 것입니다.

신원면에서 적을 확인 할수 없었던 3대대 주력부대는 빨치산은 흔적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하자 젊은 여성을 무차별로 성폭행하고, 노약자들에게 강제로 군수 물자 등을 동원케 하고, 정보 장교 이종대는 노인, 부녀자 등을 현장에서 총살하는 등, 수복이라는 미명아래 아주 난폭하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951년 2월 7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연합 작전의 대 토벌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산청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제 1진은 산청 방면에서, 제 2진은 함양 유림 방면에서, 제 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포위하여 지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화계, 주상, 자혜리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유림면 손곡, 지곡, 서주리 등 모든 주민들을 집결시켜 미친 듯이 무차별적으로 남ㆍ녀ㆍ노ㆍ소 어린이를 막론하고 처참한 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안내국회속기록 제35회 19, 18쪽 및 김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거창사건 학술대회(2000.10.21)논문집 참고)

당시중대장 소지품을 지고 같이 동행하였던 현재 생존자 최남철 씨의 중요한 증언으로, 당시 1951.2.7 학살 사건 전날에(정월 초하루날)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에서 3대대 소속 부대 2개중대 병력이 오전 11시경 도착 주둔하였으며(1박), 그 중 다른 중대의 중대장 소지품 등(속칭 짐이라고 함)은 거창 사람이 지고 따라 왔었으며, "이 작전이 심상찮으니 이 사람들(군인들) 요구대로 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띔하여 주었으며, 다른 중대장이(당시 중위로 기억) "이곳이 가재입니까?" 라고 묻길래 "여기는 신 가재부락이고(현재는 수철 이라고 합니다) 가재부락은 저기 산 넘어 30리 정도 가면 가재 부락이 있다"고 말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 부대 지휘관의(3대대 소속 중대장) 요청에 의하여 우리 집에서 숙박을 하고, 중대장 소지품과 먹을것 등을 지고 다음날 가재마을로 새벽 04시경에 출발, 동행하였으며, 이날 (정월 초이튿날) 가재마을 에서는 처참한 학살 현장을 정확히 목격하여 지금도 그 당시만 생각하면 몸서리 쳐지며, 가재 부락 학살이 끝나고 방곡으로 이동하여 도착하였을 때 가재 부락 주민을 학살한 중대장을 불러서 지시사항이 제대로 안되었는지 알수는 없으나 무조건 구두 발로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하였으며, "그 사람이 내가 동행한 중대장보다는 높은 상관이나 고참 장교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산청군 금서면 구아 부락 거주(당시는 금서면 신 가재 마을 거주함.) 최남철 73세 현재 생존자, 증언) 이리하여, 산청ㆍ함양의 대학살은 1951년 2월 7일 음력 정월초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산청군 금서면에 소재한 지리산 고동재를 넘어온(신 가재부락) 3 대대 2중대 등의 병력은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 여 80세 증언)무조건 가현 부락에(당시는 가재라고 호칭 됨) 들이 닥쳐, 주민들을 동네 앞 논들에 모이게 하고는, 무차별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강제로 내몰고, 가축을 내몰고, 무고한 양민을 집단 총살을 감행하였으며, 이후 방곡리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무고한 주민을 정조준하여 양민을 학살하고,(국회 속기록 ,제35회 임시회)시체 위에다 불을 지르고, 총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하였으며, 다음은 점촌 부락마을 앞 하천 변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비무장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가현, 방곡, 점촌의 3개 부락 학살인원은 360명 정도 임(국회 속기록 제35회 임시회 박상길의원 발언 참고 및, 산청군 금서면 구아부락 최남철 73세ㆍ현재 생존자로서 당시 3대대 2 중대장 동행자 증언(2001.11.2.)입니다.

약 1.5 ㎞ 정도 아래 위치한 산청군 금서면 자혜, 주상, 화계리 마을에 들이 닥쳐 가가호호를 돌며 호각을 불면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경호강변 논들과 동사 마당에서 주민 좌담회 한다며 빨리 빨리 집결하라는 국군 병사들의 독촉으로 설 명절을 맞고 있는 주민들은 놀란 마음으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마을 앞 얼음이 얼은 경호 강 빙판위로 도보로 집결하게 하여, 미리 구덩이를 파고, 주민들을 정렬시켜, 눈을 감게하고는 군, 경 가족들은 대열에서 나오도록하여 선별하는 등 앞서 가현, 방곡, 점촌 등에서 행한 양민학살 만행과는 다른 방법으로 바뀌었음을 알수 있으며, 서주리의 학살 만행은 11사단 9연대 휘하의 화랑부대라고 하는 3대대의 부대가 시국 강연회 한다고 유림면의 손곡, 지곡, 서주, 금서면의 자혜, 주상, 화계리 등 6개 마을양민들을 아침 일찍부터 집결시켜 오후 늦게까지 눈감고 줄을 세운 후 기관총, 소총으로 정조준, 또는 수류탄으로 눈을 감고 줄서있는 양민 400여명을 처참히 학살하였습니다.(국회 속기록, 제 35회 참고.)
그리고는 시체 위에다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르고... 다음날 피해를 당한 친지와 가족들은 시체를 분간 할 수가 없어 입은 옷의 바느질 형태 등으로 자기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는 등(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 여 80세 증언) 실로 그 참상을 어찌 다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소위 지리산 주변의 산청ㆍ함양의 양민 대 학살은 장장 10여 시간 동안( 항도일보 1984.4.21. 거창사건에 가려진 2.7 참사, 이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발표(2000.10.21 참조) 에 막을 끝으로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화랑부대) 병력은, 다음 이동지역은 산청을 경유한 거창군 신원면 청연 마을에 진입한 날은 1951.2.9 이였습니다(김동춘교수 논문집 참조) 이 날부터 계속 3일 동안 세상에 널리 잘 알려진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 처참히 자행되었습니다. 이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므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나치스의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능가하는 전 세계가 전율 할만한 학살사건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4대 국회 박상길 의원 발언 속기록)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와 국가 공권력

현재의 거창, 산청ㆍ함양사건 특별법은 당시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 여당과 정부의 어려운 당정 협의와 거창, 산청ㆍ함양 유족들의 기나긴 투쟁과, 특히 거창 유족들의 투옥을 당하면서 까지 투쟁하여 쟁취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거창 유족 님과 이강두 의원님에 대하여 항상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거창 지역구 이강두 의원의 대표 발의로 입법된 사항으로, 만 45년 만에 만들어지는 처절하고 기나긴 투쟁과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한 특별법 자체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 고유제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상조사 및 관련자인 사망자와 유족의 확정

본 거창사건 등 특별법은 全文 8개 조항과 부칙으로 되어 있고, 시행령은 전문 13개 조항과 부칙, 서식 1,2 로 대체로 간단하게 되어있는 근 6년이 다되어 가는 특별법입니다. 본 특별법의 가장 핵심 사항은 가해자의 확정과 피해자인 사망자와 유족의 확정에 있으며, 사망자 및 유족 등록을 특별법 제3조 1항에 의거 국무총리 소속 하에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 위원회]에서 심의 , 결정하는 것이였으며,

중앙 심의위원은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총무처장관, 정무 제(1)장관, 법제처장, 국무총리가 위촉하는 유족 대표 5인(유족 대표 5인은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사건마다 위촉하고 ,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로 현재 동아일보 사장으로 계시는 김학준님 등 총 13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시행령이 공포되고 약 2년이 지난 1998년 2월 17일. 산청ㆍ함양군의 해당 읍 , 면, 공무원과 유족, 당시 사건지역에 살았던 증인 및 보증인으로는 관련자 등록 신청일 당시 65세 이상의 연령자 3인의,(인감 증명, 호적 등본, 제적 등본 등 첨부) 첨부 서류를 철저히 확인, 심의 완료하였으며, 경남도지사가 실무 위원장이 되는 실무 위원회 10명과 위에서 언급한 중앙 심의 위원회 확인 등을 거쳐 관련자인 사망자 총 386명(거창:548명, 산청ㆍ함양:386명)과 총 유족 732명(거창:785명, 산청ㆍ함양:732명)을 1998년 2월 17일 관련자를 등록하고 각 개별로 서면 통보하여 확정하였습니다.

또한 ※ 1960년 5월 31일부터 동년 6월 10일까지 제 4대 국회 최천, 조일재, 박상길 국회의원의 진상조사보고서(국회 제 35회 속기록 참조)도 하나의 근거와 기록이 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 볼때 제 4대 국회의 진상 조사반과, 수많은 공무원과 2년여에 걸쳐 확인 조사한 현재의 특별법에 정한대로 관련자를 확정지은 상태인데 혹자는 진상 조사를 아니하여 개별 보상을 위한 특별법의 개정을 미루자는 주장도 있는데 대한 유족 측의 입장과 확인된 진상조사기록, 확인 경위를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물론 진상 조사를 완전하게 육하 원칙에 의하여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사항은 세월이 50년이나 지났고 전쟁 중이였다는 특수한 사항은 고려 대상이 되느냐는 별개의 논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의 조사 내용
사건 가해자 및 진상조사 내용

진상조사의 가장 핵심은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왜, 어떻게 ,얼마만큼 피해를 주고, 입혔는가를 밝히는 사실 확인 작업이라고 한다면,

  • 가해자는 : 국가 공권력이며(육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의 지휘관 3명(오익경, 한동석, 김종원)
  • 가해 일자 : 1951. 2. 7(음력정월초 이튿날)부터~ 11일.(4일간)까지 이며,
  • 가해 장소 : 경남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리 및 함양군 휴천면 점촌 마을, 유림면 서주리 및 거창군 신원면 일원이며,
  • 누구를 : 산청ㆍ함양 사건 사망자 우동호 외 385명(조사후 등록된 인원기준 386명)
    • 거창, 산청ㆍ함양 사망자 등록 인원은 총 934명임. (해당 관련 유족 1,517명.)
    • ※특별법 제7조 의 규정에 근거한 유족 등록.
  • : 빨치산 공비 토벌 작전을 이유로 통비 분자라는 누명으로 무고한 비무장 양민 학살 등
    • (위 공권력 지휘관 3 명 사법처리 근거:1951.12.16. 대구중앙고등군법회의 판결(재판장 강영훈 준장, 현재생존)
  • 무엇으로 : 기관총, 소총, 수류탄, 유류(기름) 등.( 4대 국회 제35회 임시회 속기록 근거)
  • 피해 규모 : 인명 피해 386명(중앙심위위원회 등록확인 기준근거) , 재산 피해 불상.
  • 현존하는 피해자 : 생존 유족 732명의 한 맺힌 삶과 통비 분자 가족으로 낙인, 수십년 간의 직ㆍ간접 적인 피해를 당함.
  • 피해 보상 의무자 : 국가 (국군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 할 의무가 있음.)

안내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에 의하여 희생됨을 확인한 중앙심의위원회 (국무총리, 내무, 법무, 국방, 총무처, 정무1장관 및 법제처장 ) 및 경남도의 실무 위원회가 확인한 인정, 증거 문서참조.

국가 공권력이 가해한 확정의 근거
  • 대구중앙고등군법회의 가해(학살) 부대 지휘관 3명 사법처리
    • 판결문 등( 2001.4.25. 육군고등검찰부 서기 박찬주가 등본 발행한 [고등군법회의판결확인(단기4285년 육군본부 (경북 대구), 문서번호 법무 제 84호)] 및 [판결심사 장관의 조치] 에 대한 육군 참모총장의 집행승인조치(단기4284년 12월16일) 문서의 근거
  •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1996.1. 5. 법률 제 5,148 호)

유족의 처참한 현실과 유사사건

위령사업과 유족의 비참한 현실

이와 같이 거창, 산청ㆍ함양 사건과 특별법은 형식 요건은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한 명시적인 내용에 의거 현재 거창군과 산청군에서 각 각 명예회복 차원의 위령사업으로 합동 묘역 조성을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거창사건 유족회장과 산청ㆍ함양사건 유족회장은 "정당한 명예 회복은 국가가 인정하고 사과까지 한 사건을 법치국가로서 국가배상법에 의한 당연한 의무를 외면하고 방치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 2000.10.22. 거창사건 합동위령제 문철주 회장, 2000.4.29. 산청ㆍ함양사건 합동위령제 유족회장 정재원) 당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의 학살 사건현장에서, 어머니, 동생 2명 등 가족 3명이 희생되고 당시의 11살의 어린 나이에 홀홀 단신 지금까지 어렵고 어렵게 살고 있는 최금전 여자 62세 (산청ㆍ금서ㆍ 화계리 거주) 의 유족과 부산시 남구 감만동에 사는 유족 장덕순 여자 68세는 남편과, 어린 시동생 4명, 시어머니 등 일가족 6명이 모조리 희생 학살되고, 홀홀 단신 19살의 청춘으로 혼자 살아남아 발버둥치며 살아봐도 한 많은 유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월 5,000원의 유족 회비도 내기가 어려운 너무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2001.10.30. 함양군 유림면 지곡 마을 최 병철 남자 69세 유족은 원통한 유족의 멍애를 쓰고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외치며 활동하다가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등, 실로 유족의 생활이라는 것이 너무 너무나 어렵고 비참합니다.

또한, 저희 유족 대부분은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여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살아 갈뿐 아니라 지금도 노령 등으로 이 세상을 비참하게 하나둘씩 하직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아프고 눈물나는 현실 앞에 목이 메일뿐입니다.

현재 국회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에 있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의 개정안의 심의 통과를 강력히 주장하고 이에 대하여는 관련 국회 상임위에 행정자치부 장관님이 출석하시고(2001.6.15. 국회 222회 임시회), 현 집권 민주당에서도 당정 협의를 2차례나 한 것으로 보아 (2001. 10. 13. 거창사건 합동위령제 이강두 의원 추모사, (이근식 행자부 장관 동시참석, 별도 추모사) 이 문제를 여러 측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입법이 완료된 공권력에 의한 유사 사건 등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국민 희생, 피해 사건에 있어서 입법이 완료되어 국가가 명예 회복과 개별 보상을 실시하였거나 실시 중에 있는 유사사건 입법에 대하여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의령 경찰관 총기난사사건 등 여타 크고 작은 사항들이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큰 사례는 현재 보상을 완료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6122호 일부개정ㆍ)]과, 현재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신청, 접수 중에 있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법률 제6123호 신규 제정,2000.1.12.)]과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6117호 신규제정,2000.1.12.)]은 현재 진상조사 및 위령사업을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9년 9월 29일 AP 통신 보도에 의한 한ㆍ미 양국 대통령 지시에 의하여 조사가 시작된 한국 측 대책단장은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미국 측 대책단장은 마이클 애커먼 중장으로 미국 측은 2001년1월 12일 한ㆍ미 합동조사보고서 공동 발표와 동시에 미국 대통령 클린튼의 '깊은 유감( deeply regret)' 표명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175만 불의 타협안을 발표한 것은 유사 사건에 대한 입법 및 처리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봄니다.

유사 사건 법과의 형평성

위에서 말씀드린 유사 사건의 법률과 특별법은 공히 국가 공권력에 의한 공권력 집행의 잘못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국가가 보상, 명예회복 등의 책임을 진 사항임이 분명 하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잘못이 없는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데 대한 국가의 도덕적, 정신적, 물질적인 보상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피해를 加한 軍人 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입증된 거창, 산청ㆍ함양 사건은 일반 민사법적인 시효를 이유로 일부분의 희생자 명예회복 조치는 시행하면서 현재 여타 다른 사유를 붙여 희생자 와 유족에 대하여 개별 보상을 실시하지 아니 한다면 이것이 과연 법치국가와 민주, 인권 국가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침 국가 인권 위원회도 발족되었습니다.

지난 수 십년간 국가 권력 기관에서(군과,경찰,검찰,국정원 등) 저질러진 인권 유린행위를 과연 얼마나 개선 해 나갈지( 2001.11.2. 조선일보 사설)관련 저희 유족들은 지켜보고자 합니다.

억울한 죽음으로 구천을 떠도는 원혼에게 국가는 진솔한 빚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인권 피해! 가장 존중되어야 할 가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 입니다. 국가 공권력이 순수한 양민에 대한 고의적 범죄는 민사시효법에 우선하여 국가가 이체변제의 배, 보상을 해야할 의무는 무한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도덕적 법 해석 일 것입니다. 또한 특정한 사례의 예를 들지 아니하여도 이미 동일 공권력에 의한 보상 사례의 입법과 집행된 사항이 전례가 있으므로 그 형평성을 주장함이 무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의 묘지를 합동 이장하고, 단장하는 것이 진정한 유족의 명예회복 조치라고 말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거창, 산청ㆍ함양 사건 현재의 특별법의 개정 방향제시

지금까지 사건의 사실적 이해와 지난 50여년 전의 세계가 전율할만한 사건이 지난 역사의 현실에 묻혀 있었던 것은 근 3~40 여년 간의 군사 정부하에서 감히 민사적인 법률의 시효를 논하고 대항할 수가 없었던, 오직 통비분자 누명을 쓴 약자인 저희 거창, 산청ㆍ함양, 1,517명 유족들의 삶의 역사를 어찌 이 짧은 시간에 모두 언급할 수 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2001년 10월 26일 창원지법 진주지원 황정근 부장 판사는 "유족들에게 양민 학살에 대한 국가는 배상금, 위로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획기적인 판결을 한바 있습니다. 그래도 법의 양심은 확실히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는 헌법 제 10조의 규정을 되새기면서---, 물론 민사상 시효가 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국가가 관련 유족에게 어떤 정책적 결정을 하여야 하는가를, 판단하게 하는 확실한 기준이 확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정부와 여당, 원내 다수당인 야당, 민간대표, 유족대표 등 거창, 산청ㆍ함양 사건 특별법 개정에 대한 진정한 토론과 상호이해와 허심탄회한 논의를 위하여 정책 간담회를 추진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 감정과 동ㆍ서 갈등은 하루속히 치유하는 정책이 무었 보다도 절실하다 할 것입니다. 항상 정치적인 구호로만 주문 할 것이 아니라 80년대 광주의 크나큰 상처는 잘 아시다시피 김영삼 정부 시절 위령사업, 국가 보상, 민주화운동으로의 정립 등, 명예 회복과 더불어 마무리를 무난히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에서 거창, 산청ㆍ함양 의 영남에 대한 엄청난 역사적인 아픈 사건을 마무리를 잘 하는 것 또한 실질적인 한 부분의 동서 화합과 국민 화합의 실행이 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남ㆍ북 통일을 내다보고, 민주인권 국가로서의 위상과 국민 대단합과 민족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하여서도 반드시 이, 거창, 산청ㆍ함양 사건 유족의 보상을 위한 특별법 개정의 명쾌한 마무리를 해야하는 숙명적인 임무가 바로 국민의 정부와 16대 국회가 그 실험대위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등" 자로 인한 불필요한 논쟁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시점에서 {거창 사건 등 }의 "등" 자로 인하여 산청, 함양에 많은 혼란이 있는 것처럼 해석이 분분한것 같지만, 이 리에서 분명히 저희 732명 산청ㆍ함양 유족을 대표하여 밝혀둡니다.

지금까지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 7명이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에 의하여 희생된 사실에 대하여 중앙심의위원과 위원장인 당시 국무총리 고건, 현 서울 시장님의 명백한 문서(등록번호 산청 1~303 및 함양등록번호 1~96. 사망자 확인서, 사망자 및 유족 결정 통지서, 사망자 및 유족등록 통지서의 사망경위서 문서기록은 물론, 국방부 법무 01254-947 호(1991.9.19.) 로 산청,함양 사건 유족회장에게 민원회신한 문서 근거에서도 거창사건의 국군 부대인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산청, 함양지역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1951. 2. 7. 부터 전개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창과 동일 부대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15대 국회에서 위와 같은 사안이 인정, 확인되어 입법이 완료되고, 2001년 6월 18일 2차례나 거창 유족회와 산청,함양 유족회의 합동으로 서명하여 국회에 [개정안]까지 제출하여 국회 행자위 법안 심사 소위원회에서 2차례나 심의까지 완료한 사항 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여 드리면서, 거창사건 등 특별법의 중앙심의위원인 국무위원 7명이나 확인되어 있는 사항으로, "등"자로 인한 산청, 함양에 대한 전혀 논란의 소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6년이 다된 지금에 와서 저희 유족들을 두번, 세번 울리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앞으로 저희 유족 모두는 결단코 간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고, 분명히 밝혀 두는 바 입니다.

아울러 한인섭 교수님의 거창 사건 등 특별법 개정(안)에 대하여서는 저희 산청, 함양 유족회에서는 1996년 1월 5일 정상적으로 국회를 통과하고 정상적으로 위령 사업이(2003년 2월 현재) 국가 예산으로 거창과 같이 이미 집행되고 있는 등, 동일한 부대에 의한, 동일한 사건임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증명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창 유족회 단독 보상을 전제로 하는 어떠한 개정(안) 도 동의할 수 가없으며, 현재 국회 행자위에 저희 특별법 개정(안)이 2000년 12월에 이미 거창 유족회 대표와 산청, 함양 유족회 대표가 합동 서명하여 제출한 개정 법률안에 대하여 국회 행자위 법안 심사 소위 심의를 2차려나 한 바 있는 특별법 개정(안)을 제외한 어떠한 개정(안)도 결단코 수용 할 수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그 이유는 현행 특별법은 거창사건과 산청 함양 사건이 유사사건이 아니고 만 천하가 다 아는 역사가 증명된 [동일 사건]이기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대한민국과 만 천하가 다 아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 사실의 사항을 인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어떠한 노력도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행위라는 것을 명심하여 주시기를 첨언합니다.

끝으로 우리 국민의 폭넓은 이해와 여기 학술대회에 참여하여 주신 훌륭하신 교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참석자 님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움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 공청회 일자 : 2001.11.15.
  • 공청회 장소 : 서울 프레스 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