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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견벽청야)

이 영상물은 산청ㆍ함양 양민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작 된 것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시청을 바랍니다.
남북분단 삼팔선에서 천리 먼길 지리산 어머니 품속같은 지리산 자락에서 천왕봉을 하늘처럼 바라보며 살아온 산청과 함양사람들 그들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것도 국군의 총탄에 쓰러져 갔다. 빨치산소탕이라는 미명아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산청 함양지역이 빨치산의 거점역할을 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청소작전을 감행했다. 이 청소작전은 이른바 작전명 제5호로 국군 11사단의 작전기본인 견벽청야이다.

(해설자 자막)

보병 11사단은 견벽청야 작전수행의 장본인 최덕신이 이끄는 사단으로 제9연대는 제주4?3사건 진압에 참여하여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입혔고, 그 후 11사단에 배속되어 산청함양양민학살의 주범이 된 부대이다.
“그럼 먼저 이번 작전계획에 대해 설명하겠다. 우선 1대대, 2대대는 이 곳 주둔지를 출발하여 작전지역 배후에 벽을 쌓고 3대대는 이곳 거창을 출발하여 본 작전의 임무를 수행토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작명 제5호의 작전목표는 1951년 2월 4일 12시부터 5일간 작전지역 내 잔적을 섬멸하는 데 있었고 작전결과 잔적은 무고한 양민이 되고 말았다. 9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제3대대의 작전을 돕는 후벽기능을 수행했으며 양민학살의 주범인 제3대대는 거창에서 출발하여 신원면을 거쳐 산청읍, 가현, 방곡, 점촌, 서주로 벨트를 이루는 10시간의 걸친 학살행진을 별지 투명도에 의해 자행했다. 별지 투명도는 작전지구 내 지도위에 학살대상자를 각 면별로 기록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학살의 할당된 인원을 살펴보면 함양군 휴천면 1천명, 유리면 3백명, 거창군 신원면 8백명 ,산청군 금서면 5백명 도합 2천 6백명을 계획사살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청함양양민학살사건과 거창 신원사건은 작전명 제5호에 의해 자행된 동일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연대 3대대는 설날인 2월 6일에 금서면 향양 수철리에 도착하여 하룻밤 야영을 한 다음 설 이튿날인 2월 7일 새벽 5시경 수철을 출발하여 끔직한 학살의 대장정에 나서게 된다.
“07시부로 작전명령 제5호를 개시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침 7시경부터 40여 가구를 뒤져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뒷동산으로 몰아갔다. 뒷동산에 높은 낭떠러지로 주민들을 몰아넣자 아비규환의 소란속에 몇 몇 어린이, 노약자들은 팔,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학살의 현장에는 죽음을 앞둔 모자의 애끓는 눈빛도, 가족을 살리겠다는 아우성도 총성에 묻혀졌다. “이 어미가 너를 죽이는구나”
“어무이”
“조용히 못해”
이렇게 정월 초이튿날 차디 찬 논바닥에서 가현마을 123명은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놔 둬라, 이것들은 오늘밤 호랑이 밥이다.”

(증언자 증언 자막)

가현마을을 죽음의 마을로 만들어 놓은 군인들은 오전 10시경 방곡에 도착했다. 집안을 뒤져 젊은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끌어 냈으며, 주민들을 달래듯이 좌담회니 좋은 소식이니 하여 동네논으로 나오라 소리를 질렀고 쓸만한 물건은 다 들고 나오란 말도 덧붙였다. “좋은 소식을 알려 주겠다” “ 자 좌담회가 있으니 동네 앞 논으로 나오시오” “ 돈 될만한 물건들은 가지고 나오시오” 논바닥으로 내몰린 주민들을 향해 마을의 젊은이들이 어디 갔는지를 말하라는 위협을 했고, 대답이 없자 총을 난사하여 살육의 난장을 자행했다. “너희 가족 중 젊은놈들은 다 도망갔다. 젊은놈들은 다 어디 있나, 모두 눈 감아” 학살을 마치고 점촌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마을에서 달려 나온 아주머니의 통곡소리에 군인들은 되돌아와 확인학살하여 총상을 입은 다수의 생존자들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에이 이놈들아”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방곡마을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주민이 212명이나 되었고 후에 학살현장인 논바닥에서 나온 유골이 80kg들이 쌀가마로 여섯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증언자 증언 자막)

방곡마을의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1시 30분경 아랫마을인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에 도착했다. 점촌마을 역시 가현, 방곡의 경우처럼 20여호의 주민들을 학살장소로 내몰면서 가축을 끌고 나오기도 했다.
“조용히 안 해”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우리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 엉뚱한 생각하면 곧바로 황천길로 보내버릴 것이다”
마을주민들을 학살장소로 내몰고는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고, 주민 60명을 이유불문하고 학살했다. 여기서도 1차 학살후에 시체더미에서 의식을 찾은 중년여인의 울부짖음으로 인해 확인학살의 과정을 되풀이했다.
“에이 백정놈들아” “죄없는 사람을 이리 죽여 놓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천벌을 받을 백정놈들아”
“앉아 있어”
“어이구”

(증언자 증언 자막)

점촌마을의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작전이 지연된다는 이유로 대대장이 중대장을 다짜고짜로 두들겨 패기도 하여 작전시간지연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주강변은 군중을 모으기에는 안성맞춤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서주리 양민학살작전은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설 이튿날 아침 밥상을 물리는 시간대쯤에 산청군 금서면 화계, 화산, 자혜, 유림면에 지곡, 손곡 등에서 주민을 모으기 시작하여 오전 11시경 7개마을 1천여명의 주민들이 서주강변 둔치에 모였다.
“아저씨, 아침 드셨습니까?”
“음, 너 많이 컸구나, 밥 먹었나?”
“이 새끼들, 웃고 자빠졌어”
군인들은 남편이 어디 갔는지에 대한 심문하여 선별하였고 군경가족은 1차 선별기준을 적용하여 학살의 대열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군인들 중에 마음약한 군인 몇 몇은 주민들의 살 길을 터주기 위해 도망갈 기회를 주기도 했다.
“ 이중에 경찰 가족 없나”
“이중에 군인 가족 없나”
오후 4시경 학살을 자행해 살기등등한 제3대대가 서주강변에 당도하자 상황이 살벌해졌다. 뽑히지 않은 대열은 유림지서로 보냈고, 뽑힌 대열의 사람들은 밤나무밭 구덩이에 몰아넣어 기관총을 난사했고 이어 수류탄을 던져 넣는 10여분간의 참담한 만행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백명의 시체더미에 휘발유를 붓고 불까지 지르는 만행이 이어졌다. 서주리 경호강변에서 학살당한 양민이 310명에 이르고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증언자 증언 자막)

정월 초이튿날인 1951년 2월 7일 하루동안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가현, 방곡, 점촌, 서주 네개 지역에서 705명이라는 엄청난 학살자를 내고도 거창사건등관련자 명예회복심사위원 회는 사망자를 386명을 확정하였습니다. 유족회 사망자수와 확정 사망수가 일치하지 않는 데는 온 가족이 몰살되어 사망신고를 할 연고자가 없었다는 반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전체사망자의 성별 연령별 분포도를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분포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한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10대가 175명을 전체 사망자의 45.33퍼센트이고, 예순살 이상이 21명으로 6.45퍼센트 스물살부터 쉰살까지의 여자가 89명으로 23.03퍼센트이다. 학살에 희생된 부녀자, 어린이, 노약자가 84.81퍼센트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이는 학살부대가 내세운 작전의 명분인 통비분자 학살대상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머니 품속 같아야 할 지리산의 한 골짜기는 생명도 인권도 유린당한 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능멸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