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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형왕릉

  • 위치 : 금서면 화계리 산16-1
  • 관리기관 : 국유
  • 지정번호 : 사적 214
  • 규모 : 45,000㎡
  • 시대 : 사단법인가락중앙종친회

소개

가락국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왕릉은 구형왕 구해(九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왕릉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무인석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구형왕릉의 가을
구형왕릉의 가을
구형왕릉의 여름
구형왕릉의 여름

전문설명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왕릉은,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구형능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무덤은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석수가 각각 1쌍씩 있다.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산음헌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가락종친이 봄가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방장산(지리산)자락의 왕산(王山)으로 들어가 4년여를 지내시다 붕허하셨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구형왕릉은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조정에서 제향을 모시도록 배려했다. 정조 11년(1798)부터는 가락종친회에서 봄·가을로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제향을 받들고 있다. 구형왕은 세 아들 세종, 무력, 무득은 신라에 들어가 나라의 융성을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은 화랑으로 장군이 되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여 가락인의 기개(氣槪)를 드높혔다.

김유신 장군은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어 사후 162년 흥무대왕으로 추촌되었고 가락종친의 중시조(中始祖)로 추앙(推仰)받고 있다. 산청 구형왕릉은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요 전통 한방의 고장 산청의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