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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정희
제목 제1회 산청,함양 인권문학상 수상작 "화계리"
내용 수상작 '화계리' 일부를 올립니다.

1. 화계리 - 아아, 김성곤의 6․25

지리산이 영봉인가 아닌가
해발 1915미터 천왕봉
봉우리를 봉우리게 하는 것 무엇인가
물어나 보자
북으로 아래턱을 이룬 중봉 발치에
서서 중봉에게 다잡아 보랴
아니면 써리봉 지나 20리길
치발목 산장에 눈갖다 붙이고 물어나 보랴
아니면
여기서 이삼 키로미터 거리 이단폭포
그 시원한 물줄기에 귀 헹구며 알아나 보랴
대답 없으면 내원사로 내려갈까
유평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갈까 아도 저도
아니야 외고개 재를 넘어 좋이 십리길
지리산 첫동네 오봉리로 와 다소곳한 오봉
쳐다보며 짚어나 볼까
답답하면 어쩌는가 한 십리 아래
가현 지나 방곡에 와 마을 당산
서낭당에나
아뢰어 볼까 바람 한 줄기
돌이끼 훑다가 동구 멀리 빠져 나갔나

2.

어린이 김성곤
나이 여덟에 2년 과정 방곡 간이학교
1학년이 되었다
1941년 동구 멀리 빠져 나간 바람
보리고개 허리를 감돌다
어느새 보일락 말락 한 해가 갔다
2학년이 되자 걸리적거리는 일본말
그것만을 데리고 책을 보다가 돋아난
쑥캐러 가는 어머니 따라 다녔다 쑥내음
물큰한 것 물큰하다 못하고 아버지 칡뿌리
파온 것 칡뿌리라 말못하는 우리말 벙어리 신세
절구에 칡뿌리 넣어 떡메로 쳐도 힘좋은
우리 아버지 우리 말 석자로 부르지 못했다

3.

간이학교야 어서 빨리 분교장이
되어라 손 꼽으며 2학년을 거쳐 세번을 다닌
어린이 김성곤
대한 독립만세 부르는 대신 보통학교 3학년
진급의 꿈 버렸다.
소고삐 쥐어 주시는 아버지 잔기침
뒤에다 두고
울러멘 망태 흔들며 걸리적거리는 것 일본말
시내에 후울 내던져버리고 휘파람
불었다. 다음날
조그만 새끼 지게 낫꽂아 짊어지고
짚신 하나 둘러메니 뱃속에 잠긴
노래 절로 나와라 한 해 두 해
세월도 일곱빛으로 서다 눈깜짝이로지는
무지개

4.

정원 대보름 당산제
동네사람 다 모여 정성들여 지냈다.
밤톨만한 떡쪼가리 나누고 돼지고기 겨우
한 점에 한 사발 농주 거나해질 때
대동회 열렸다
결산보고 끝나갈 무렵 언제년에 소금
한 가마니 어디로 갔나 반동들 해먹은 것
부지기수다 구장 반동 처단해라
모래골 반장 대답하고 가현 반장 꼼짝
마라 삽시간에 아수라장
구장은 발이 빨라 바람처럼 사라지고
월식씨 발에 밟혀그자리 숨떨어졌다
용케도
참말로 용케도 그뭄골 처가에 가 계신 아버지
걱정하며 열네살 김성곤의 가슴
삼바리처럼 떨었다
……

15.

능소 앞 신작로로 군용 추럭
그칠 사이 없이 밤 도와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장고개 너머 언덕 아래
발이 삐어 길 놓쳤나 추럭 한 대
하늘 보고 누워 있다 나동그라진 드럼통 열고
동네 아이들 신이 나게 소주병에 휘발유 채워
소총 하나 줏어 메고 흩어진 실탄
탄갑에 끼워 넣어 종일을 심심찮이
심신찮이 놀던 그날
아시논 매러 김성곤 방곡으로 올라갔지
동네로 들어서니 섬뜩한 기척이 있어
조심스레 발을 떼어 놓는데 빨강 완장
팔에다 찬 이들 두서너 명
밭둑으로 웃동네로 눈에 불켜고
왔다 갔다 하지 않나, 가슴 콩콩
그 불에 뎅길까봐 이냥 뛰는데
완장을 벼슬로 가진 이 모다 남의집
살던 사람!
세상이 바뀐다 바뀐다 하는 말이 이를
두고 하던 것가
불켠 눈만 피하여 김성곤
농사일 오르내리는데 그 불이 머리로 와 뎅기는가
싶더니 가슴으로 뱃덩이로 이어 아랫도리
온몸 사지 불이 났다 며느리심에
된통
걸리었네 붙기는 불이 붙었는데 사시나무
떨듯이 이를 바락바락 갈면서 떠는
한기로 피골이
상접하는 것 아닌가
……

33.

화정산 능선이 어둑발로 젖어내리고
건너편 똥메산의 굴밤나무
여우울음 빛깔 뒤집어쓰고 강물 출렁이는
소리로만 살아났다
어느새 남자들 기백은 웃논에서 웅성거리며 있고
애기를 업고 안은 여자들
열대여섯평 네모로 파놓은 한 길 높이 구덩이로
밀려들고 있었다
아이고 이제 죽음이 구덩이 모양으로 다가왔네
저 어린 것들이 빨갱이란 말인가
세상에 나 햇빛받아 산 이래 누나 손톱
봉숭아 물 그것밖에 본 일이 없는데
빨갱이가 당할 말가 여보시오 부인네들
가슴에다 감홍시 빛깔 들여본 일 있능기요
있기야 있지요만 그런물도 빨강인가 판별이나 해 주세요
철이날 무렵부터 가슴이 울렁거려 쌓는 일 더러 있었고
아지랑이만 잡고도 힘이 자지러지듯 빠지는 일
있었는데 빛깔로 치면
빛깔로 친다면 빨주노초파남보 어디에
드는가요 어디에 든다고 쳐도
그게 목숨을 내놓을 일이던가요
속말로 재고 있는 김성곤이
구덩이 쪽을 보는 찰나 쿵… 지르르를
땅덩어리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이어 김성곤의 뒤쪽 지근거리 쿵… 지르르를
지표 무너지는 소리나자
천지가 풍지박산에 구름이 땅바닥 위 깔리고
허공이 흙자갈밭 둔갑했구나
둔갑인지 아닌지 몽롱한 허공에 찬바람이
어둠을 물어 나르는 듯한데
그 어둠 어디쯤인가 소련제 삐알기관총의
총구가 번쩍 빛났다 그 빛깔이
진동이 되고 무덤이 되고 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옴지락거리는
물든 역사가 되었다

34.

하늘아래
지리산이 영봉인가 아닌가
하늘에다 물어볼 밖에 없구나
해발 1915미터 천왕봉
봉우리를 봉우리이게 하는 것 무엇인가
이도저도 하늘에 물어볼 밖에 달리
길이 없구나
봉우리 아래 어둠 어디쯤인가 소련제 삐알기관총
총구가 번쩍 빛났다 빛깔이
진동이 되고 무덤이 되고 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옴지락거리는
물든 역사가 되었음을
죽음이 구덩이 모양으로 온 것처럼
구덩이 깊이의
옴지락거리는 역사가 되었음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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