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과 꺽지

산청지역의 인물

남명 조식선생과
꺽지

Person

남명 조식선생남명 조식선생은 창녕 조씨로서 승문원의 판교인 조언형의 아들로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건중인데 태어날 때「우물에서 무지개 빛이 방에 뻗치어 가득 찼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할 무렵부터 아버지께서 외우는 글을 따라 읽고 잊지 않았다고 한다.

성격이 활달하여 자질구레한 예절같은 데에는 구속되지 않았으며 글공부를 즐기다가 그의 아버지가 벼슬길에 오르자 5세때 서울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살게된 대곡 성운과 같이 도의를 닦고 경서를 모두 익힌 다음 널리 통하였고 특히 병진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였고 노장학에도 깊이 파고들어 옛 글에 능하였다.

그리하다가 25세때 성리학을 처음 읽고 원나라 선비인 노재 허형의 말인 '모든 일은 낱낱이 살피어 물질을 쫓아갈 것은 아니다' 라는 데에 크게 감동을 받고 이때부터 더욱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다 한다.

26세때는 부친이 돌아가시어 고향인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살다가 30세때 처가가 있는 김해군 탄종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사하면서 산해정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38세때 나라에서 헌릉참봉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도학공부만 열중하였으며 48세때는 전생서의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또한 나가지 않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사화 이후 흩어진 선비들을 모아 학문에 힘썼다.

51세때 종부시 주부에 임명하자 이도 사양하고 55세 때에는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어도 또 받지 않고 정치하는 방향만 글로써 국왕께 올렸다. 61세 때에는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와서 별세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으며 65세 때는 당시 윤비(명종왕비)의 친정 사람으로서 나라를 주름잡던 윤원형이 쫓겨나고 사림들이 다시 조정에 들어서자 국왕이 부르므로 사정전에서 왕과 마주앉아 정치하는 도리를 의논하다가 8일만에 덕산에 돌아오고 말았다. 69세 때에 종친부의 전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1572년에 접어들면서 병이 심하여 72세를 한평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남명선생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의 생활과 그가 남긴 문장들을 통하여 추술해보면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크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실행에 중점을 두어 직절하고 의리있는 꿋꿋한 선비정신이다. 그의 학문을 경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이란 안에서 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요 의란 밖으로 사물을 올바르게 처리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해야 된다는 점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그가 평소 공부하면서 옛글 가운데 긴요한 말들을 적어 모은 학기류편에 그의 지조가 꿋꿋한 선비의 기질임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 몇 개만 알아 보기로 하면,

  • 삶이 당연하면 살고 죽음이 당연하면 죽는다. 만종의 재물도 내일의 굶주림도 또한 대수롭지 않으며 오직 의리가 있는 바이다.
  • 천도가 유행하는 데에는 털끝만큼의 속임도 없고 모두 진실한 도리가 맡아 행한다.
  • 충신과 진덕에서 의리를 함께 보존하기까지에는 용감하고 엄격하고 절도있고 결단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 의리를 쌓아서 원만하게 된 다음에야 저절로 꿰뚫어 통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선비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 그의 가르침은 모든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임진왜란이란 민족적 위기를 당하여 대의명분으로 국가를 위해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는 많은 의병장수를 배출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로는 자기의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과 백성과 선비가 임금과 관리보다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상이다. 그는 선비가 벼슬길에 나선다면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일을 하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국록만 허비하는 염치없는 것이므로 자기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평생 벼슬하지 않고 버틴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때 나라의 분위기가 사화에 휩싸여 그의 소신대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벼슬에 나간다해도 일은 하지 못하고 국록만 없앤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백성과 선비가 임금과 벼슬아치보다 높고 근본이라는 것으로 국가란 결국 국민에 의해 세워지기도 하고 뒤엎어지기도 하는데 민심을 얻는 자는 그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우게 되고 민심을 잃은 자는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심을 생각하여 자기 뜻을 버리고 백성과 더불어 선을 행한 요와 순을 크게 찬양하였으며 또 임금과 대신의 관계는 정적인 것이므로 국가의 사이에 있는 대신은 간신의 횡포를 막고 백성과 선비의 지위를 높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다음으로는 남명선생의 학문이 우리나라 유학사상에 차지하는 위치와 끼친 영향을 그의 학문적 특색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이전부터 조상의 주된 성리학풍을 이어받은 퇴계 이황선생 같은 이론적인 학문보다는 실천적인 면에 더욱 힘을 써 경상우도의 토착한 선비들이 종사가 되었으며 특히 유학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노장학에도 상당한 인식을 가졌다.

그는 이론이 많다고 해도 꼭 도리를 밝게 통했다고는 볼수 없다고 하면서 이론과 저술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는 또 학문의 실용성에 역점을 두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처음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만일 그것에 힘쓰지 않고 성과 명에 관한 깊은 것만 연구하려 한다면 이는 인사에서 천리를 연구하지 않는 실득이 없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의리를 해득하는데 한결같이 서책에만 의지하면 무엇으로 거처에 편안함과 자신의 깊음을 알겠는가 라고 하면서 책을 통한 이론에만 치우치지 말고 가까운 생활주변에서부터 이론을 실천하도록 말하고 또 고요히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세상일에 나아가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려우니 학문의 궁극적 성취는 실행에 두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특히 경과 의를 기본으로 삼고 목적은 행동에 있고 그 행동은 의로서 아닌 것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여 추상 일렬 같은 기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학문적 태도는 바로 그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학설의 요점은 68세때 선조왕에게 올린 무진봉사에 잘 나타난다. 이른바 명선이란 궁리를 말함이요 성신이란 수신을 말함이다. 성품안에 먼저 이치가 갖추여져 있나니 인의예지가 곧 그 근원이요 만가지의 착함이 이로부터 나온다. 마음이란 이치가 모여드는 주인이요, 몸통이란 마음이 담겨진 그릇이다. 그 이치를 캐어냄은 장차 쓰기에 의로 함이요 그 몸을 닦음은 장차 도를 행하려 함이다 라고 학문에 대한 견해와 목적을 분명히 밝히었다.

그는 학문의 근본을 경의에 두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또 자신이 실천하여 당시 사람들이 허영만 팔아 국가재산을 축내는 벼슬에는 아예 접근조차 않았으며 몇차례의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정치하는 도리만 설명하고는 번번이 돌아왔는데 속세를 등지고 조정에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사화로 계속 선비들이 수난만 당하는 형편이므로 벼슬에 임명되어도 신념대로 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명선생은 초야에 묻혀 오직 처사로 불리워짐을 좋아하면서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이 이론적인 것보다는 실천면을 인간본위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 영향은 매우 큰 것이어서 영남사람들이 대체로 낙선호의하는 것은 남명선생의 유풍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며 이는 위대한 지도자의 인격적 감화가 국가의 교화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다투어 의병이 된 것은 투철한 교육이념이 반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산청은 이러한 지도이념의 발원지로서 한국역사상 중요한 위치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는 고장임을 자랑할 수 있다.

끝으로 남명선생의 문인들에 의한 학통의 형성을 알아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 학문에 힘쓰면서도 중앙정계에 나가서 도의 정치를 한 사람들이니 곧 오건을 비롯하여 정구, 김우홍, 김우옹, 김효원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 스승과 같이 은둔하는 선비들은 최영경, 이제신, 하항 등을 들수 있다.
  • 임진왜란 때 창의를 했던 의병장들은 곽재우, 조종도, 이로, 정인홍, 오운등으로서 그들은 충절을 다바쳐 의병을 일으켜 구국 항쟁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문인들이 낙선호의하는 선비정신에 투철한 것은 남명학통의 특성이었다.

이들은 당초 각처에서 은둔대학자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지리산 및 덕산으로 몰려 들었다. 중세 서양에서 큰 학자가 있던 옥스퍼드(Oxford)나 파리(Paris)로 학생들이 몰려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처음에 서당식 교육을 조직하여 마침내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우리도 만약 이때 교육제도를 조직화 했더라면 산청의 덕산에 동양최대의 대학이 발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들은 동문학으로서 학문으로 상종하고 의리로서 맺힌 학통 혹은 영남우도학파라 불리기도 한다.

이와같은 학파로 계통화한 이들은 이후 정치계에서 또 학계에서 역사상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들 인물을 빼고서 한국 역사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명선생의 지도이념이 그 근원으로서 유덕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남명선생의 고고한 유덕을 찬양하여 문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증직하였으며 길이 전승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덕산에 덕천서원을 세우고 사액받아 지금도 제향하여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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