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우 곽종석

산청지역의 인물

면우 곽종석

Person

선생의 성은 곽이요, 본관은 현풍이다. 종석은 그 이름이며, 자는 명원, 또는 연길, 호는 회와 또는 면우이다. 현종 12년(1846년 병오) 6월 24일,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그의 어머니의 꿈에 큰 돌산이 입에 들어 온 선몽으로 곽원조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처음의 이름이 돌뫼라 한다.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준수했다.

땅 : 넓고 큼이 하늘과 같은데 그 위에 펼친 나라가 몇인가?
이 시는 곽종석선생이 4세때 재주가 있음을 기이하게 여긴 분이 땅을 문제로 글짓기를 권했다.
어린 그는 선뜻 '慶大天與同 基上機滿國' 인가 라고 지은 시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비상하였으며, 그 기량의 큼이 잘 나타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경북 성주로 한주 이진상선생을 찾아 스승으로 섬겨 성리학에 능한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을 닦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880년(34세)에 어머니 상을 다해 거상중 밤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온돌방에 거처하지 않았다 한다. 1883년에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태백산의 학산이 은둔하기에 알맞다고 생각되어 이듬해 그곳으로 이사한 일이 있었다.

1895년(49세) 조정에서 충청도 비안 현감으로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8월에 민비가 시해되자 일본의 횡포에 분격하여 이듬해 봄에 서울에 가서 천하대의를 밝히라는 포고문을 지어 여러나라 공사에 보냈고 1896년(50세)에 거창군 가북면 다전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53세때(1899년) 고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중추원의 의관에 임명되었어도 취임하지 않았다. 1903년 7월 통정대부의 비서원승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했으며 다시 칙임의관과 칙임비승을 내렸어도 사양하려 하였는데 고종은 비서랑을 보내어 같이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에 평복 그대로 뵈옵기를 고집하니 임금도 마침내 받아들여 유건을 쓰고 도포차림으로 돈량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고종 임금은 정치하는 길을 하문하였고 다음날에는 의정부의 참찬을 제수하였으며 수일 뒤에 고종께서 다시 찾아뵈오니 당장 급한 시무에 대하여 하문하셨다.

선생은
  • 숭정학(올바른 학문을 높여서 장려를 하여야)하고
  • 결민심(민심을 수습하여 단결되게 하여야)되고
  • 정군제(군사의 체제를 제정 확립하여야)되고
  • 절재용(국가의 재산 확보를 위해 절약을 하여야)됩니다. 고 주상하였다.

고종은 크게 감동하여 그를 서울에 거처할 집을 하사하매 사양하였더니 고종은 면우에게 앞에 품신한 시무4조에 관한 세칙을 정하여 올리라 명하였다. 수일 뒤에 성문하여 상송만 하니 임금께서 다시 불렀으나 10월에 돌아오고 말았다.

59세 되던해(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0월에 서울에 가서 임금에게 상소하여 매국한 5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하고 11월에 임금과의 대면을 청하였으나 관리들이 알리지 않아 3일을 기다렸으나 통지가 없어 그만 돌아오는 길에 옥천에 이르렀을 때 입궐하라는 통지가 있었다. 그러나 거창 다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뒤로는 제자들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선생은 3백여년 동안 끊어진 영남우도 학통을 재흥시키는데 많은 후진을 양성함과 아울러 조선의 유학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한 거유로서 문장에 능달하여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면우문집(165권)을 한성서관에서 편찬하여 남겨져 있다.

그는 1910년(순종 4년) 나라가 일본에게 병탐 당했음을 분격하여 통곡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19년(대한 임시정부 1년)에 파리장서를 내게 되었다. 이 장서관계로 한국유림단 사건이 일어나 수난을 당해 투옥되어 병보석 후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선생의 업적은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로 요약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광복 운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3.1운동」,「파리장서운동」을 일으키게 한 동기는
  • 1910년(경술년) 한일 합병조약이 일본의 강제적인 것
  •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것
  • 국제적 민족자결,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

특히, 유림으로서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던 것은 일본놈이 한국유림 명칭을 도용하여 일본 정부에 독립불원서를 매국노인 이완용을 정치단체 대표로 김윤식을 유림 단체 대표로 하여 제출한 사건이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전쟁뒤에 세계평화회의가 열리면 반드시 한국문제가 말썽이 될 것을 대비하기 위한 간악한 술책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유림들은 일본의 간계를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독립청원서를 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때 서울의 윤충하와 김창주가 곽면우를 찾아와 서울의 움직임의 정세를 말하고 독립청원서 운동의 대표가 되어 줄 것을 청하기로 즉석에서 승낙하고 두 사람을 보내고 곧 조카인 곽연과 제자인 김황을 서울에 보내 정세를 살펴 윤충하와 상의하여 일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울로 가서 윤충하를 만나 일을 시작했다. 이 「독립청원서」의 명칭을 파리장서로 변경하고 간단하게 「장서운동」이란 말을 통하였다.

그리고 김창숙과의 편지 연락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장서운동을 준비하던 중 김황과 곽연등을 만나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3·1운동은 국내적으로, 장서운동은 국제적으로,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같은 때 서로 연결된 목적은 한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곽면우는 장서를 지어 김창숙으로 하여금 만일을 염려하여 글을 외우게 하고 곽연을 불러서 글을 쓰게 하여 그 종이로 신총을 만들어 메투리 한컬레를 준비하라 하고 김창숙을 보내면서 중국에 가서 우리 동지들과 중국 정부와 손을 잡고 친히 알았던 이문치를 만나면 손일선을 움직여 줄 것이다 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현덕을 같이 가도록 지시하자 일본 헌병이 김창숙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어, 이를 피하여 이웃집에서 잠을 자고 천행으로 서울로 가서 전국 유림대표 137인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에 가기위해 통역할 사람으로 박돈서, 이현덕, 김창숙으로 정하였고, 소개장은 서울 유림이 보내기로 하였다. 운동비로 모은 돈은 중국을 드나드는 상인의 물건속에 넣어 보내 봉천에서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23일밤 일행 세사람은 봉천행 기차에 올라 이튿날 새벽에 상인으로부터 돈을 찾아 3월 28일 상해에 도착하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고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 대표 김규식을 통하여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장서를 독일, 중국, 불란서 각국의 말과 영문으로 수천장씩 번역 인쇄하여 세계 각국 영사관 및 신문사 등에 우편으로 보냈는데 동시에 전 세계가 알게 되었고 국제 여론 환기에 일대 경종을 울린 것이다. 상해에서 보낸 장서가 국내에도 왔다.

이래서 일제는 국제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게 되었는데 전국 유림단체에 검거 바람이 일어났었다. 이것이 유림단 사건이다. 이때 영호남에서는 잡힌 유림은 모두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곽면우선생은 재판에서 2년간의 실형이 언도 되었으나 병보석으로 나와 그만 그해 74세로 별세하였으니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기에 천신 만고만 겪고 광복의 오늘같은 영광을 일찍 보지 못한채 자기가 지은 장서에 기록한 말과 같이 저 지하의 백골로서 그 충혼이 생생하게 이 조국의 남북통일 이루는데 보우하고 계실 것이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인들이 사적지마다 사당과 비석을 세워 향화를 받들고 백대에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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