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당 문익점

산청지역의 인물

삼우당 문익점

Person

남명 조식선생선생은 서기1331년 2월 8일 고려 강성현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에서 남평문씨 충정공 문숙의 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총명하고 온후하며 어릴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큰 학자이신 가정 이곡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서기1360년 공민왕 9년 정동성 과거에 급제하시고 다음해에 경덕재를 수립하셨다.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을, 공민왕 10년에는 예문관 직강을 하셨고 그 다음해에는 순유박사, 이듬해에 좌정언이 되어 서장관으로서 원나라에 가는 사신 계품사 이공수 일행과 같이 가셨다.

이때 고려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 왕시가 원나라에 머물면서 고려에서 잠입한 최유와 음모하여 원나라 대신 삭사감과 환자인 독로첩목아와 박불화 그리고 본국의 김용과 내통 공모하여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세울 계략으로 원나라 순제의 승낙을 받고 명망이 높은 문익점 선생에게 동조하기를 강요하였으며, 원나라 임금 순제도 선생에게 예부사랑의 높은 벼슬자리를 주면서 음모에 가담토록 권하였다. 그러나 문익점선생은 절의를 지키고 거절하였다.

그 후 서기 1364년에 이들은 고려를 쳐들어오다가 고려의 장수 최영과 이성계에게 대파하고 말았다. 그들의 음모가 이렇게 실패하자 선생은 원나라 순제의 미움을 받아 서기 1364년 11월 지금의 월남땅 교지국으로 귀양길을 떠나 다음해 3월에 적소(귀양간 곳)에 이르렀다.

그 후 원나라 임금도 문선생의 의견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문선생을 귀양에서 풀어주게 되었으니 그때가 서기 1366년 공민왕 15년 이었다. 순제는 선생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으니 신하 되기를 원했으나 선생은 본국 고향에 노부모가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줄 수 없음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귀국하니 공민왕이 선생의 충의에 감동하여 중현대부에 예문과제학과 지제교의 벼슬을 제수하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는 성균관 학관에 뽑히고 그 다음해에는 동관의 사성이 되었다. 서기 1385년 우왕 11년에는 전의주부가 되고 그해에 청도군사를 강론하셨으며 서기 1389년에 좌사의대부로서 시학이 되어 학문을 위하는 길을 상소로써 논하였다. 이때 이성계와 조준, 이정 등이 전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선생은 반대한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가 59세였다.

문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이성계가 친히 청하여도 나가지 않고 거절하였고, 이태조 7년에 별세하였다.

그 후 태종이 문익점 선생의 높은 공덕과 충의를 높이 평가하여 강성군으로 봉하였고, 또한 충선이란 시호를 추서하셨다. 세종께서는 의정부의 영의정으로 증직하였고 부민후의 후작을 추서하셨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절의를 지키다가 원나라 순제의 미움을 받다 귀양살이를 할 때에 그곳에서 피어있는 목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동 김용으로 하여금 그 목화의 종자를 따게하여 금수품인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붓대롱에 넣고 귀국하여 번식시킨 점이다. 그때가 서기 1367 공민왕 16년 정월에 원나라에서 출발하여 2월에 개성에 돌아오셨다.

그리하여 고향인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배양에서 목화를 시배하였다. 시배지는 사적 108호인 단성면 사월리 106번지의 1 밭이며 이곳에 목화시배 사적비가 있다. 시배에 성공하고 종자를 선생의 빙장인 정천익에게도 재배케하여 해마다 많은 종자를 거두었으며, 전국적으로도 널리 보급하였다. 이렇게 재배된 목화는 씨아에 넣어 종자를 빼고 물레에 돌려 실을 뽑고 베틀에 올려서 면포를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 부유층은 명주나 모시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보통 평민은 갈포나 삼베로 옷을 입어 겨울을 지내는 고통을 겪었는데 목화로 면포와 솜을 가지고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의류생활의 일대 개혁을 가져왔으며 국민경제는 물론 국가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공덕이 이러하니 세종이 선생에게 부민후라는 후작을 추서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목화의 가공법은 선생의 손자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또는 선생의 장인 정천익 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다. 조선 초기 정종이 사액하고 태종 때 건립한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은 선생을 모시고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선생은 우리고장 산청이 낳은 유신이며 성리학자로서 당대의 충신과 애국 애족자이였다.
선생은 자호를 삼우당이라 하였다.

그의 뜻은
첫째 나라의 운수가 부진한 근심,둘째 성학의 발달이 부진한 근심, 셋째 자신의 학문이 부진한 근심,
이 세가지 근심으로 평생을 충, 효를 바탕으로 몸소 실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나라에서 효자비라는 정려를 내렸다. 당시 선생이 계시던 지금의 배양에 그 정각이 존재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충과 효를 다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부를 안겨 주었으니 참으로 선생이 남기신 정신적, 물질적 문화는 우리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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