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계 오건

산청지역의 인물

덕계 오건

Person

덕계 오건선생은 향토 산청이 낳은 도학자이다. 남명의 수문이요, 또는 퇴계가 사랑하던 문인이니 조선유학의 최고봉인 두 스승에 왕래하여 남명의 경의학과 퇴계의 이학에 깊이 영향을 받아 중앙 정계에서 지행일치의 소신을 실천한 도학 정치가이다. 그는 1521년(중종 16년) 산음현 덕촌에서 함양 오씨 참봉공 세기의 독자로 태어났다. 자는 자강 호는 덕계이다. 천성과 재질이 총명하여 9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었다.

그러나 11세에 부친을 여의고 28세까지 계속 다섯번(부친상, 조모상, 조부상, 자친상, 계조모상)의 시묘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학문할 기회를 빈곤과 슬픔으로 놓친 것이다. 그가 지극한 효성을 다했으므로 향리에서 귀감이 되어 포상하였으나 그것도 사양하였다.

28세에 성주 이씨와 결혼하여 후사를 얻으니 그가 오장이다. 선생은 가세가 빈곤하여 척지산의 정수암에서 독학을 하였다. 31세때 진사 시험에 합격한 뒤에 덕산으로 남명조식을 찾아 학문을 닦았다.

1558년(명종 13년) 38세때 대과에 급제하여 39세때부터 관직생활에 나아갔다. 첫 벼슬이 성균관 교유로서 경북 성주에 가서 당시 목사인 금계 황준량과 같이 녹봉정사를 짓고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이때 이질인 한강 정구를 불러 사서까지 가르쳐 수제자가 되었다.

이때 도산으로 이퇴계를 찾게 되었는데 43세였다. 다음해 성균관의 학유가 되어 서울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52세때 고향에 돌아와 1574년(선조 7년) 5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보면 학문은 독학으로 자성한 기초위에 남명의 경의를 바탕으로 한 실천학 그리고 퇴계의 이기를 주로 한 이론학을 융합한데 그의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는 독학자성한 방법을 제자들에게 '나는 외숙부인 도양필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 다른 글들은 독학으로 스승없이 해독했다. 15세전에 중용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수없이 거듭 읽고 나니 자연히 통달되었다. 중용책을 읽은 횟수를 알 수 없고 대학은 천여번, 그 외는 어느 것이나 4∼5백회씩은 읽었다.' 라고 말했다 한다.

남명과 퇴계를 찾았을 때는 학문에 일가견을 이룬 다음이었다. 남명은 그를 「중용」,「대학」등에 강론과 구명이 절실하고 철저했다고 말한 것이 잘 증명하고 있다.

퇴계도 오건이 황준량과 주자서절요를 출판한 것을 보고 감탄하여 한번 만나기를 바랐다. 또한 퇴계는 제자인 유희범에게 보낸 글에서 '자강은 천성에 질박하고 도학에 힘써 왔을 뿐 아니라 인정이 깊고 두터우니 참으로 유한 벗이다.'라고 말하였다.

덕계선생의 학문은 중용에 치우쳤다. 중용이란 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고 기울어짐도 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공정을 이상으로 파쟁이나 편당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가 사관에 천거되었을 때 사양하고 '내 어찌 천고의 시비속에 들어가겠는가?' 하면서 거절하고 파쟁이나 시비를 멀리한 중용정신 발로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한편 그가 실천한 정치의 실상도 백성을 위하고 바르게 살려는 이론에 입각한 실천가였다.

그가 국왕께 올린 6회의 소차와 51회의 장계에 잘 나타나 있는데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교육에 힘쓴바 있었던 그는 경연에서 국왕에게 교육에 힘쓸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즉위하자 임금은 뜻을 겸손하게하여 학문에 정진하여야 하며 허심탄회하게 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도의를 앙양시키는 것이다. 정치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도의를 솔선수범해야 된다고 거듭 상소를 한바 있는데 그중에서 왕족의 혼인이 허례허식으로 낭비 폐단을 들어 의례 간소로서 먼저 국혼으로부터 개선할 것을 주장한 국혼비례소 그리고 특히 왕족들의 가정이 잘 다스려져야 국민이 모두 본받을 것이요 궁중에 외척과 인척이 무상출입을 않아야 부정부패를 막을 것이며 질서가 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외척들을 제거하는 청제가소는 특기할 만한 그의 용단이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선생은 강상에 죄를 범한 자는 신분이나 지위를 묻지 않고 규탄하였다.
신사정의 불효를 단죄할 것을 간청한 7회에 걸친 장계, 신사정은 선조의 생질이며 교관이었던 그는 그의 어머니(공주)와 짜고 사전에 내통하여 성질이 좋지 못하다는 빙자로 그의 아버지인 신의를 쫓아내 버린 것이다. 도의가 땅에 떨어진 하나의 예이다. 그리고 신사정이 궁중에 내통한 것은 자전을 모신 석상궁인데 이를 축출한 3회에 걸친 장계, 즉 창출석상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에 그는 강경히 그들을 단죄할 때마다 국왕앞에서 이퇴계의 간언이 있어 도움이 되었다 한다. 이 사건은 외척 및 궁중과 정면으로 대결한 사실로서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며 권력앞에 드문 일이다. 셋째, 부정부패의 척결과 탐관오리의 숙청이다. 선생이 가장 정열을 다한 과업이다. 외척으로서 임지를 이탈하여 서울에만 있을 뿐 아니라 상관에게 반항까지 한 상주판관을 파면 요청하여 축출하였고 또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요, 외척인 심전에게 벼슬을 주는 어명을 철회하라는 요청, 사람이 용렬하고 불평만 하면서 병정을 해이케한 경상병사 홍언성을 파면 요청하는 등 파면요청 건수는 수없이 많았다. 끝으로 백성을 구제하는데 관한 것이다. 선생은 백성들의 고달픈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선조3년 (50세)에 삼남지방으로 어사 및 재해 조사관으로서 민정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 구체적 강구에 힘썼다. 각 지방관이 거두는 농민의 공물은 백성의 살을 깎고 피를 짜내었다.

심지어 말먹이 풀, 참기름, 들기름 등 농사만 지으면 입은 싸라기라고 구경못할 정도로 과중한 불법세를 내다가 하는 수 없어 중노릇, 거지, 유망민이 되고 농사를 짓지 않으니 농촌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농촌붕괴를 구제함에는 그 원인부터 개선할 정책을 상소하면서 다시 어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농촌의 실정을 철저히 조사하고 감세, 감역, 황폐한 농토를 개간케하여 양곡의 증산책으로 유망민을 안정시켜야 하며 막심한 민폐를 없애기 위하여 지방부조리를 막아 바로 잡아야 된다고 논계하고 가는 곳마다 부폐된 관리를 축출하여 정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생은 불굴의 신념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선조4년(51세)에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합칭하는 이조전랑이 되어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있어 백관들이 선망하는 자리로서 자기의 후임을 정함에도 절대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5년에 그는 후임 전랑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였는데도 뜻밖에 외척이요 이조참의인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심은 신진사류의 진출을 막는 속셈이었다. 심의겸의 당파적 반대는 예가 없는 것으로 곧 붕당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덕계선생은 판서가 될 차례인데도 그의 후임 천거에 이론이 분분할 뿐 쉽게 받아들이지 않자 시대의 귀추가 이상 더 경륜을 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모든 요인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유성룡과 율곡이이도 선생의 귀향을 서러워했으나 51세로서 그의 도학정치는 끝을 맺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3년째인 1574년 병으로 사림과 향인들의 통곡속에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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