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산청군 전경
지명유래 山(뫼산)淸(맑을청) - 지금의 산청(山淸)이란 조선 영조 43年때부터 사용된 현명(縣名)이다

지명유래

지금의 산청(山淸)이란 현명(縣名)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영조 43年때부터 이기는 하나 산청이 현재와 같은 행정단위로 된 것은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11면의 행정단위로 된 것이다.

현대의 특수성과 사회상황에 따라 행정구역의 변동과 명칭이 바뀌었으며 따라서 산청군의 이합(離合)된 역사와 군명의 변천은 산음현(山陰縣)과 단성현(丹城縣) 두 현의 변천되어온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음현(山陰縣)

산음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나타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지방관제로서 9주 5소경을 완성한 것은 문무왕(文武王) 17년에서 신문왕 17년이었다. 경덕왕 16년에 이 고장 명칭이었던 지품천현(知品川縣)을 산음현(山陰縣)으로 개칭하여 궐성군(闕城郡) 소속게 하였으며 그 후 현치(縣治)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서 지금의 생초 "곱내"에 두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있어 그 초기에는 신라시대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8대 현종 때 지방제도가 완성됨에 따라 산음(山陰)과 단계(丹溪)는 합천(陜川)에, 강성(江城)은 진주(晋州)에 소속케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2년에 산음현과 강성현에는 중앙에서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통치케 하였다. 감무란 현감을 두지 않은 작은 현의 행정책임자를 말한다. 이 때 산음과 강성은 독립현이 되어 합주와 진주의 관할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단계는 이때 합주로부터 강성현에 소속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직후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게 되는데 산청에 있어선 현치(縣治)를 고읍(古邑)에서 신읍(新邑)으로 옮긴 다음 최초의 감무(監務)가 파견케 되었다. 조선 14대 선조 32년 왜구(倭寇)의 분탕으로 단성이 일시 산음현에 통합되었으며 이 해는 정유재란(1597年)이 일어난지 2년 뒤였다. 단성은 15년 후에 독립군으로 복귀했다.

산음현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말의 일제침략 과정에서 큰 변동을 겪게 되었다.

갑오경장후 고종 32年(1895년)에 단성과 함께 각각 군으로 승격되었다. 을사늑약을 맺은 다음해인 광무 10년 1906년(병오) 9月 24日 칙령 제49호로 진주군에서 파지(巴只), 백곡(栢谷), 금만(金萬), 사월(沙月), 삼장(三壯), 시천(矢川)의 육면(六面)을 분할받아 군의 규모가 배가된 것이다.

단성현(丹城縣)

삼국사기에 나타난 단성 최초의 명칭은 궐지군(闕支郡)이다. 경덕왕 16년(757년) 궐지군은 궐성군(闕城郡)으로 명칭되어 이때의 현치(縣治)는 성내리(城內里)에 있었다. 궐성군은 산음(山陰) 단계(丹溪) 두 현을 속현으로 삼았다(757~1018의 261년간이다.) 고려시대에 들어 강성현(江城縣)으로 개명되어 치소(治所)를 강누(江樓)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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